마이크 테스트












페이지 링크입니다.

 

본 공략은 공략이라기 보다는 정리를 한것입니다.

각 엔딩설명 공략의 경우 편안한 관람을 위해 간략한 설명만 했습니다.

 

그런데 왜 3번 엔딩만 관람수가 가장 많은거죠?(웃음)

 

 

공략의 시작:http://blog.naver.com/abc1135/110174190183

 

엔딩설명 공략:http://blog.naver.com/abc1135/110174190787

 

후기:http://blog.naver.com/abc1135/110174239751

나는 빨간망토(모자)를 소재로한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영화 등을 봤다. 

그리고 이 게임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카론이라는 사람이 신랄한 게임을 잘 만든다지만 단편이면서도 이정도의 물건을 만들줄은.....

 

내용 짧아서 한글화하기 쉬웠겠지라는 소리는 인간으로서 절대로 하지말자. 한글화했기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미코토 일기도 그렇고.

 

아무튼 만일의 하나라지만 미코토 일기 찾다가 여기왔다면 이쪽으로 가도록.

 

이미 공략을 만들었다.

http://blog.naver.com/abc1135/110174189723

 

위의 링크로 출입하도록. 미코토 일기 보러왔다가 이거 보게된 사람들을 위한 편의다.

 

아 그리고 개인적으로 추측하자면 저 숲은 샛길로 새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평행시간대로 가버리는 숲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엄마가 딸보고 샛길로 새지 말라고 한것이다. 샛길로 새는 것만으로 인생이 달라지는 위험한 숲이 있을줄이야......

 

그나마 빨간망토 안불행해지는 엔딩을 베드엔딩이라고한게 찝찝하지만.

 

엔딩리스트입니다. 엔딩들은 다른분들도 장엄한 설명을 하셨으니 저는 그냥 간단히 설명할께요. 

저는 저 숲이 평행시간의 세계라고 추측합니다. 단지 그 뿐.

 

 

[엔딩1]할머니가 병에걸리자 돈이 아깝다고.....

 

 

 

[엔딩2]길을 잃었다. 왜 이런 일이.....

 

 

 

[엔딩3]두말할 필요가 없다. 저 한국의 고종석같은.....(고종석 검색하면 꼭 여기로 오세요)

 

 

 

[엔딩4]모든게 계속 실행된 계획의 하나였을 뿐이다... 불쌍한....

 

 

 

[엔딩5]이 엔딩 본 사람들은 인?되는거 아니랴고 생각하지만 난 그런 절망은 싫어요. 못해도 하녀가...

 

 

 

[엔딩6]카론 이 사람은 왜 이걸 베드엔딩으로 생각한걸까? 나중에 후기에 내 생각을 적어야겠다.

퇴마록을 소설로 읽었다면 다들 아실껍니다.

그러나 퇴마요새는 결국 망했습니다.

 

그리고 퇴마록 온라인이 뒤를 이었지만 당연히 망했습니다.....

 

이거 스토리가 뭐였을까요?

 

 

 

 

2002년 월드컵에서 히딩크가 성과를 거둘수록 히딩크는 엄청난 미래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그 예언입니다.

 

그런데 히딩크는 왜 한국에서 안사는것인가!!! 히딩크를 귀화시켜라!!! 한국인으로!!!

 

 

2014 브라질 월드컵이 개막하고 슬슬 32강전 경기들이 진행되고 있네요.

 

사실 대한민국에서 월드컵, 하면 2002 한일 월드컵을 빼놓을 수 없죠.

당시 저도 당연히 거리응원이나 단체응원을 했는데...지금도 그날의 감동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ㅠㅠ

 

그래서 오랜만에, 2002년 당시 유행했던 히딩크 유머를 퍼 왔습니다 ^^

 

 

 

[한국인들에게는 거의 영원히 클래스로 기억될, 거스 히딩크 감독]

 

제목 - 대한민국의 2002년 한일 월드컵 성적에 따른 히딩크의 미래

 

1. 1승도 못거둘 경우〓쓸쓸히 고국행. 그러나 이미 무효화된 시나리오.

 

 

2. 1승, 그러나 16강 진출 실패〓모두 아쉬워한다. 대다수 국민은 “히딩크는 할 만큼 했다”고 두둔한다.

    그러나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한국인들의 환송 속에 떠난다.

 

 

3. 16강 진출〓국민의 열광 속에 히딩크 귀화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4. 8강 진출〓히딩크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 전 국민이 히딩크 팬이 돼 강제귀화를 당하게 되며 한글로 된 히딩크 위인전이 나온다.

 

 

5. 4강 진출〓히딩크는 ‘축구당’을 만들어 정계에 진출한다. 대통령 후보는 한국 토종을 내세우고 히딩크는 당수가 된다.

 

 

6. 결승 진출〓당 내에서 히딩크 파가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히딩크 동상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7. 우승〓히딩크교가 전국을 휩쓸어 우리나라는 히딩크 영도 아래 제정 일치의 전제군주제가 된다. 히딩크 어록을 학생들이 외워야 한다.

 

추가) 히딩크를 한국으로 귀화시켜 '희동구'라는 한국 이름을 주고 상암 희씨의 시조로 삼자(...)는 애정어린 농담도 있음

 

 

...사실은 저도 찬성...-_-;;

 

뭐 이제는 한국의 감독직을 다시 맡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최고의 축구감독 하면 역시 히딩크 씨가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이번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홍명보 씨가 감독을 맡아서 살짝 불안하지만-

그래도 우리 선수들 화이팅해주세요!!! 질 땐 지더라도, 최대한 노력해서 집시다!!! 화이팅!!!

 

빨간망토 다크사이드의 공략이라지만 사실상 짧습니다. 

 

이 시작부분을 보시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다음공략은 무지 간단하게 엔딩 전부가 나열될꺼에요. 

 

 

 

라시엘님의 호족시리즈 마지막입니다.

모두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지식을 알려주신 라시엘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마지막 글입니다. 오랜만에 전체를 쭈루룩 읽어보는데, 참 길게도 썼네 싶네요. 저야 그냥 쓴다지만 어떻게 다들 읽으시는지. 하하하하;;; 어쨌든, 마지막은 다시 시작으로 돌아갑니다. 이 시리즈의 첫 시작을 유가와 법가의 충돌이란 관점에서 호족-황제 체제의 충돌 과정으로 시작했었죠. 기억나세요? 안 나시겠지만 그랬었어요. 하지만 이건 호족의 사상적 기반, 정치적 현상이 일어나게 된 현상들을 설명하면서 썼던 것인 만큼 조금은 단편적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번 마지막 글은, 이 당시 유학에 아예 초점을 집중하여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진시황의 시절이 끝나고 호족, 황제들의 대립 시대가 도래하면서, 가장 중시되었던 사상은 유학이었습니다. 황제는 법가의 실패에 따라 법가를 더 이상 내세울 수는 없었지만 자신들을 포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가를 이용했고, 호족들 또한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유가를 이용하였습니다. 물론 둘의 의도가 명백히 다른 동상이몽의 시대였지만, 이러나저러나 둘다 유가를 가지고 떠들떠들했으니 유학의 부흥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왜 이토록 유학을 떠들어댔느냐. 법가야 명분을 잃었다지만 한고조 유방이 초기에 들고 나왔던 도가도 있고 묵가도 있고 종횡가도 있고 병가도 있고 제자백가가 괜한 소리가 아니듯 다들 말만 죽어라 떠들어대서 이 소리도 있고 저 소리도 있는데 왜 하필 유가였느냐.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지배 질서가 확실한 사상이기 때문이죠. 법가의 지배 질서는 실패로 돌아가서 더 이상 얘기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묵가 스타일은 지배층에게 내키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의 도가는 그래도 수용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죠. 국가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도가는 확고한 정치 철학이 없는 학파였던 만큼 점차 소강 상태로 접어들고, 가장 지배층의 입맛에 맞는 유가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체계적인 통치 기술의 제공입니다. 유학의 논리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군사부일체로 압축됩니다. 황제는 곧 아비요, 백성은 곧 아들이니 가정에서 아비를 자식이 섬기고 아비가 집을 다스리는 것처럼 다스려라. 이게 유가의 정수의 정수의 정수만 빼서 군더더기 다 털어버리고 나오는 얘기입니다. 소위 온정적 가부장제라고도 불리는 부분인데요. 이처럼 유가는 군민의 관계를 정합적으로 설명, 정당성과 정통성의 근거를 마련해주는 좋~은 학문이었습니다. 당연히 황제의 구미에는 맞을 수밖에 없겠죠? 근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사대부입니다.

 

본래 황제라는 체제가 발생한 것은 법가 사상에서였습니다. 법가 사상에서의 황제의 위치는 이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천하를 차지하고도 자기 뜻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천하를 질곡으로 삼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말해서 본래의 황제는 말 그대로 마이페이스, 지맘대로 지꼴리는대로 하는 것이 곧 황제였습니다. 법가는 군주의 독점적 지위와 권력 행사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법가 질서 하에서의 황제는 자신의 지위와 위엄에 의해 천하를 다스리는 자였습니다. '법'가라고 해서 현대 성문법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법가에서의 법은 곧 판례법이요, 판례란 곧 황제가 말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유가에서의 황제는 어떨까요. 유가에서의 황제는 곧 "존현의 체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질고 학덕이 높은 이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의 지배를 인정하는 구조입니다. 근데 안 어진 사람이 황제랍시고 나서면? 역성혁명이 괜히 있겠습니까.

 

즉 유가는 황제의 절대적 존재를 부정합니다. 법가가 안 되니 울며 겨자먹기로 쓰긴 써야겠는데, 처음부터 삐그덩 노선 타는 거죠.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앞에서 살짝 언급했던 사대부의 문제입니다. 유가의 질서는 군-민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군과 민 사이 신, 즉 사대부라는 새로운 계급층을 상정합니다. 여기서의 사대부는 황제와 인민을 매개하며 그 중간 단계에 있는 또 하나의 통치자를 가리킵니다. 유학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란 황제-사대부-인민의 3개 계급이 군주를 정점으로 모든 이들이 사회적으로 할당된 자신의 직분에 소속되어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를 말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통치자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아니, 이 문제는 그 이상입니다. 유가 질서에서의 황제는 우주적 원리, 현명하고 어진 이로서의 체현자이며, 실질적인 국가의 치자 역은 사대부가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황제와 사대부는 긴긴 시간 동안 싸워왔고, 그래서 전 그 내용을 같이 공유하고자 긴긴 글을 써왔습니다. 그리고 그 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을 계속 괴롭혀왔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좀 더 재미있는 현상이 시작됩니다. 바로 기존 유학에 대한 거부 현상입니다.

 

사실 유학이 사회의 실질적 이데올로기를 장악한 것은 이미 후한 광무제의 등극 이후입니다. 황제는 계속해서 그것을 방어해보려고 하고 그 과정이 후한을 거쳐 삼국 시대 내내 관통하는 과정이었습니다만, 이것은 권력 투쟁 과정에서의 산물이며 그 이전에 사회적 이데올로기는 이미 유학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제 개인적인 생각에 따른 것입니다만, 사회 이데올로기의 성향은 상부 -> 하부 -> 상부 조직의 순서로 전파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이데올로기적 시스템은 분명 상부 조직, 정치 권력층이나 엘리트층에서 발생합니다. 현대적 민주주의로 나가기 위한 길을 제시했던 로크, 루소 등의 인물도 상부 조직에 소속되어 있던 이들이었고, 가장 하부 조직인 프롤레타리아층에 주목했던 공산주의조차 그 발안의 시작은 지식인층이었던 칼 마르크스였습니다. 최초의 발생은 지식인, 정치인 등이 주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부 조직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하부 조직의 일원들에 의해 이데올로기는 변형, 제창조됩니다. 그리고 최초 상부 조직층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이데올로기는 다시금 상부 조직의 보수적 세력을 위협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투쟁이 일어나고 그 투쟁에서 승리한 이데올로기는 전체 시스템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이죠.

 

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황제 정권에서 동중서, 육가 등의 의견을 받아들이며 유학을 채택하기 시작했던 것이 유학 이데올로기의 시작이었다면, 이것이 하부 조직으로 전파되면서 전체 사회를 바꾸고, 그것이 다시금 상부 조직을 위협하는 상황이 후한대와 삼국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즉 전한대의 구조는 이 중 상부 조직에서 하부 조직으로의 전파 과정이었다면, 후한대와 삼국시대는 하부 조직의 상부 조직에 대한 투쟁 과정이며, 서진 이후의 정권은 상부 조직까지 장악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상부 조직에서의 투쟁 과정에서 유가와 기존 황제 정권의 충돌이 있다는 것은, 동시에 하부 조직에서는 이미 유학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있다는 것은 동시에 그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발이 생길 것이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이미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기 시작한 유가가 상부 보수 조직과 싸우고 있는 사이, 유가 내에서는 동시에 기존 유학에 대한 반발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특히 기존 유학의 형태가 이러한 판도를 나타나게 한 이유로 지적됩니다. 기존 유학은 기본적으로 잔구학이라 하여 구절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경학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존의 유학은 그 당시 지식인들이 집중했던 두 가지 측면 중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개혁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완전한 실무 중심,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의 요구에 대해서는 보수적이고 경직되어 있는 경학 중심의 유학이 의미를 가질 수 없었고, 일류 사대부를 중심으로 하여 좀 더 고상한, 세상의 원리 등을 파악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요구에 대해서도 역시 기존 어구에만 집중하는 형태가 의미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한말삼초를 기점으로 이에 대한 반발과 새로운 학문에 대한 추구 경향이 일어났고, 그 반발의 유형은 저 두가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법가, 맹정으로의 회귀입니다. 즉 혼란스러운 정국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유학으로는 불가능하고, 이미 그것을 종식시켰던 예시를 보여주는 법가적 방식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가, 법술적 방식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조조였으며, 그러한 방식에 수많은 이들이 동조했던 것도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풍조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 방식을 필요로 하다 생각했고 그렇기에 조조에게 동조했던 상당수의 이들이, 여전히 대부분의 경우 유학자라는 신분은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조는 정말 이례적인 인물이었고, 그 외의 인물들 중 상당수는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 즉 법가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관점과 신분적으로, 또는 기존의 교육 속에서 유가의 방식으로 교육받아왔던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모습들을 보입니다. 순욱, 최염 등이 그러했고 정말 법술적 성향이 매우 강했던 유엽조차 그 혈통적 문제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갈량 또한 이러한 경우의 하나였다고 봅니다. 이것이 삼국 시대 전체를 통틀어 일어나는 숱한 정치적 현상들을 만들어낸 이유였습니다. 사족으로 한마디 더하자면 곽가가 조조와 그토록 잘 맞았던 것은 곽가가 기존 유가적 입장에서 가장 탈피해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네요. 곽가가 살아있었다면 그를 중심으로 법가적 성향의 파벌을 형성할 수 있었을 테고, 호족 세력들과 대립하고 있었던 조조의 가장 강한 원군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조조의 개혁이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곽가의 죽음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근데 오늘 할 얘기의 중심은 이쪽은 아니고요.

 

두번째로 현학입니다. 주인공 등장하는 건 원래 초반이어야 하는데요. 베스트셀러는 글러먹었네요.

 

현학적이라는 말을 한번쯤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쓸데없이 어렵게 말한다, 뭐 이런 뜻이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결코 좋은 의미의 말로 나오는 말은 아닙니다. 실제 이 시기의 현학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론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학의 전통이란 측면에서 봤을 때, 그리고 동아시아 사상사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현학은 정말 매우 엄청나게 지독히도 중요한 사상적 흐름이었습니다. 부사 참 많네요.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에요.

 

그렇다면 현학이란 뭘까요. 현학이란 삼현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을 말합니다. 삼현이란 노자, 장자, 주역을 말하는데요. 현이 어질 현이 아니라 검을 현입니다. 왜 저렇게 부르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둠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까요. 어쨌든 저 삼현을 읽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문이 곧 삼현입니다.

 

공자가 주창한 유학이 현대사회에 오면서 현실성이 없다느니 구시대적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공격당하고 있는데요. 본래 유학은 지나칠 정도로 현실 중심, 실무 중심의 성향을 지닌 학문이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의 관점에 따라 많은 이들이 서양은 현실, 이성 중심적이고 동양은 신비적이고 감성 중심적이라고 인식하시는 경우가 많은데요. 간단하게 말하면 완전하리만치 착각입니다. 오히려 중심을 이루던 사상들을 보면 그 정반대라고 보는 쪽이 맞습니다. 서양 철학의 시작이었던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은 현실 세계의 우리들이 보기에는 말장난이나 다름없어 보이며, 소크라테스 이후의 학문들 모두가 형이상학적 요소가 매우 강합니다. 반면 동양 쪽은 유가, 법가 등 현실적으로 국가를 어떻게 통치하고 어떻게 안정시킬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학문들이 철학으로 자리잡아왔습니다. 유가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학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유가는 오히려 새로운 요구에 대해서는 부합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하죠. 시대는 바뀌고 요구는 달라지는데, 현실적인 문제를 얘기하다 보니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죠. 현실은 이미 변했으니 현실에 대한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며, 이상주의자들에게는 역시나 현실만 이야기하고 있으니 요구가 수용되지 않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이미 설명을 했고요. 두번째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시기 사회는 유학이 보편화되고 그것을 주도하는 사대부 계층이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하면서, 한편으로는 호족 사대부들의 귀족화가 진행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향거리선제와 그 뒤를 잇는 구품관인법은 전형적인 추천제 시스템입니다. 일전에 설명한 대로 호족들은 모두들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었고, 당연히 고급 호족들의 경우 추천받는 게 너무 쉬운 일이 되었습니다. 진짜 심각한 수준의 장애가 있지 않는 한 엔간해서는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것이죠. 게다가 관직에 나가지 않더라도 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만큼 먹고 사는 지장이 없습니다.

 

메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이라는 걸 혹시 아시나요? 그다지 복잡한 이론은 아니구요. 욕구에는 5단계가 있으며 하위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사람들이 상위 욕구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내용입니다. 단, 특정 욕구가 충족되어 욕구 단계가 올라가 있는 상태에서는, 하위 욕구가 다시 충족되지 않는 상태가 되더라도 상위 욕구에 대한 추구 성향이 나타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어쨌든 당시 호족들은 하위 욕구, 이를테면 식욕이나 성욕 등 원초적 욕구에서는 더 이상 걱정이 없습니다. 관직도 나가려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자연히 귀족들은 현실적인 문제가 점점 구차한 문제가 되고, 이상적인 것에 대한 욕구가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현학입니다.

 

그렇다면 현학이란? 앞에서 말한 대로 삼현을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삼현이란 앞에서 말한 대로 주역, 노자, 장자를 말합니다. 그럼 왜 이걸 공부하는 걸까요. 거기에서 현학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현학은 현실만 추구하는 유학에 대한 반발에서 나왔으니 당연히 현실이 아닌 이상에 집중합니다. 이상이란 뭔가. 현학이 추구하는 것은 본질에 대한, 하늘의 이치, 즉 천리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유학은 현실에만 집중해왔고, 당연히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다루는 경전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역만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답을 던져주고 있었죠. 그럼 대체 어디에서 이러한 내용을 공부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도가의 경전들, 즉 노자와 장자입니다. 현학은 이 세가지를 중심으로 천리와 세계에 대한 관념을 찾고자 했던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본질은 보이는 대상이 아닙니다. 경전에서 나오는 내용도 한계가 있고, 사실 현학이라는 것의 등장 또한 경전에 대한 지나친 집착, 잔구학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던 만큼 경전에 대한 의존도는 그리 높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볼 수 있는 것도 없고 경전에 대한 의존도도 낮다면, 대체 무엇을 가지고 본질을 논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논리입니다. 이 시기 중국에는 인도로부터 불교를 포함한 다양한 학문들이 유입되는 시기였으며, 그 과정에서 논리학 또한 유입되었습니다. 현학은 바로 이 논리학에 방점을 둔, 기존 유학은 물론 향후 유학의 발전 과정에서도 약간은 이례적인 학문이었습니다. 사실 학계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중국어는 언어 자체가 한 글자로 완결성을 지니는 형태로 구성된 만큼, 조사나 접속사 등을 중점으로 전개되는 논리학은 발전하기 어려운 형태였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현학은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관점을 반박할 만한 학문이었습니다.

 

현학의 전개는 그룹 단위의 대화로 이뤄지는데, 최소 3인으로 구성됩니다. 이 대화를 청담이라고 하는데요. 그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주담 : 주제를 정해 끌고 나가는 역할

2. 객담 : 주담과 함게 논리를 같이 토론하며 반박하는 역할

3. 배담 : 토론의 총괄자이자 사회자로 토론의 결과를 사대부 사회에 알리는 역할

 

그럼 청담에서는 대체 무슨 대화를 할까요. 여기서의 주제는 바로 명리 승부입니다. 명, 즉 이름과 리, 즉 실체를 일체화시키는 것이 청담의 주된 내용입니다. 리에 대해 가장 본질을 꿰뚫는 확실한 명제를 만들기 위해 점차 세분화하여 명과 리를 일치화시키는 것이 명리 승부라는 것인데요. 이렇게 말해봐야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실 분들을 위해 개략적인 수준이지만 예시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주담 : "닭은 사람이야"

객담 : "닭에는 깃털이 있는데 사람에겐 깃털이 없잖아"

주담 : "그럼 깃털이 없는 닭은 사람인 거지"

객담 : "닭의 날개랑 사람의 팔은 그 모양이 다르잖아"

주담 : "그럼 깃털 없는 닭은 팔이 날개의 형태로 바뀐 사람인 거지"

객담 : "......." (반박 종료)

배담 : "주담 XX님이 깃털 없는 닭은 팔이 날개의 형태로 바뀐 사람이라는 명제를 완성했습니다"

사대부들 : "와와!"

 

뭐, 설마 이런 명제를 세웠겠냐마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보시면 대충 맞습니다. 근데 사실 제가 현학 쪽에 집중해서 공부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들은 바로는 저 정도 수준의 명제도 많이 만들었다고는 하더이다. 뭐 어쨌건, 이 과정에서 나타난 말이 바로 "명사"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명사란 이러한 대화를 통해 명제를 완성시킨 이, 주담 역할을 수행한 인물을 말하는데요. 이렇게 완성된 명제는 모든 사대부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형성하게 됩니다. 향후 나오는 명제들은 기존의 명제에 의지하게 되는 구조랄까요. 기존의 명제를 근거로 삼아 새로운 명제가 나오고, 그 명제를 통해 새로운 명제가 나오는 식이라는 거죠. 결국 명제를 만든 이, 즉 명사는 사대부 사회의 기준점이자 지배적 역할을 수행하는 이가 됩니다.

 

근데 대체 뭐 땜시 이 인간은 이 재미없는 이야기를 길게길게 떠들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여기서 주목할 것이 사실 주담이 아니라 배담이기 때문입니다.

 

현학의 초기에는 앞에서 설명하는 내용과 마찬가지로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기가 지날수록 이러한 분위기는 변해갑니다. 애초에 사대부들은 아무리 권력에 동떨어진 이상, 나쁘게 말하면 헛소리만 하고 있다 하더라도 지배층은 결국 그들입니다. 그들의 대화가 결국 정치와 연결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죠. 이 과정에서 청담은 진짜 명리가 아니라 명사라는 위치를 따내기 위한 설전, 궤변이 난무하는 형태로 변해갔고, 특정한 명사를 중심으로 그 주위의 배담들이 하나의 파당을 형성하는 현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새로운 풍토가 나타나는데, 바로 인물평의 강화입니다.

 

초기 현학의 움직임을 통해 몇몇 명사들이 등장하게 되는데요. 이들이 사대부의 기준을 만드는 이들로 자리잡으면서 청담에서는 인물평이 새로운 중심 포인트로 등장하게 됩니다. 명사들이 하는 인물평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예전 글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내용입니다. 조조가 왜 그토록 허소를 따라다니면서 인물평을 얻고자 했을까요. 인물평을 얻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청담을 중심으로 하는 사대부 사회 내에 편입되었다는 의미, 어떠한 명사가 인물평을 할 정도로 명망이 있고 포텐셜이 있는 인물이라는 의미 등등 다양한 의미를 동시에 가질 수 있을 수 있는 것이죠.

 

 

현학이란 당시 호족사대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불교의 유입과 확산, 도교의 활성화 등 다양한 현상들이 모두 현학이라는 이 기이한 학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의미 또한 큽니다. 현실 중심적이었던 유학이 본질적 요소에 집중하게 된 이 흐름은 이후 송대의 성리학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형성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제외하더라도, 이것이 호족 사대부 사회의 형성과 인물들의 활동 행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합니다. 왜 순욱이 들어오면서 수많은 이들이 조조 군에 줄줄이 유입되었는지, 왜 능력도 없는 허명이라고 불렸던 허정이 그토록 높은 지위까지 올라야 했는지, 사마휘 등의 명사들이 인물 추천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방통이나 공융 등의 인물들이 인물평을 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이 바로 여기서 모두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강하팔준, 죽림칠현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대체 이들이 뭘 했느냐 하는 거죠. 하지만 현학이란 대상을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그것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이들은 사대부 사회의 내부 속성상에서는 그 정치적인 인물들을 좌우했던 인물들이 그들이었달까요. 단순히 현실에 아무 것도 안 한 것 같아서 그들이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전체 그림을 다시 그려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전체 그림에서는 그 무의미해보이는 이들이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호족 사회에 대한 꽤나 긴 글을 완결지으면서 제가 왜 하필 현학이란 주제로 마지막 글을 정했을까요. 바로 그러한 이유입니다.

 

 

예전 어떤 분께서 역사 공부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질문하신 것에 대해 답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야 사학과를 전공했어도 지금은 대학원 고민하다 끝내 때려치고 이제는 반쯤은 취미 삼아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입장이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역사에 대해 공부하시는 분들께는 이런 관점을 가지셨으면 한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건을 보실 때 절대 그 사건 자체만 보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작은 점 하나도, 별 의미 없어보이는 것 하나도 그냥 쉽게 지나가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캄의 면도날 이론처럼, 간단한 것이 진리에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라는 것은 분명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굴러가고 있고, 수많은 변수들의 연계와 전환 속에서 사건이란 그 과정에 나타나는 하나의 파편입니다. 어떤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이 수많은 변수들을 찬찬히 읽어내실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이러하니 이러하다, 라는 간단한 결론으로 도출해내기에는 사회란 충분히 복잡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역사를 좋아하고 사학을 전공한 만큼 일반인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일단 서양사 전공자인 데다가 한문 독해 능력이 떨어지는 만큼 지식에서는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단지 제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비록 부족한 지식이지만 그것을 통해 전체 그림을 그리면서 새로운 관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역사란 것은, 그러한 것을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뭔가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정사에 이렇게 나와 있더라, 자치통감에 이렇게 나와 있더라 하면 그것은 분명한 지식이며 거기에 대해서는 논박할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지식을 왜 쌓을까요. 아는 게 좋아서? 저도 지식 오타쿠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뭐든 간에 지식이 늘어나는 것에 기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 공부의 끝이라면, 그것은 뭔가 허무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진정 역사를 공부하는 의미는, 그를 통해 전체의 그림을 그리는 법을 익혀가는 것이 아닐까요.

 

전체 그림을 그리는 것인 만큼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지식의 부족, 관점의 차이 등등에 따라 사람마다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려낼 수도 있습니다. 역사학은 그러한 모든 것을 인정하는 학문입니다. 물론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겠지만, 누구도 옳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관점과 수많은 그림들을 생각하고 나누고 그를 위해 토론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수정해가는 과정, 그를 통해 좀 더 정확히 보는 법을 익혀가는 과정이 곧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 3 때부터 삼국지 카페에서 토론장에 뒹굴거렸으니 인터넷 토론만 얼추 12년을 넘게 했네요. 그 동안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고, 싸우기도 참 오죽이도 많이 싸웟고, 감정이 올라온 경험도 꽤습니다. 저런 새끼가 왜 설치나 싶으면서 속으로 열불을 삭힌 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 각각의 사건들이 감정까지 상해가면서 싸울 문제였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토론 과정들이 지식을 익혀가는 과정이었고 새로운 관점을 배워가는 과정이었을 뿐인데요. 전체 그림을 그릴 줄 안다고는 하나 저 또한 완벽하지 못하고, 세상 어느 사람도 완벽하지 못합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완벽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당연히 완벽할 수 없습니다. 좀 더 겸허하게 남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진다면, 우리의 지식도 관점도 한층 더 성숙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잡설이 길었습니다. 드디어 시리즈 글을 완결하는군요. 새로운 글로 예전에 쓰던 인물론을 계속 써볼까 생각 중이긴 합니다만, 글쎄.... 잘은 모르겠네요. 글 7개 쓰면서 이처럼 오래 걸릴 줄야. 하하하;;

 

그 동안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아직도 마지막회가 아니십니다. 하지만 다음은 진짜 마지막이에요.

 

 

격조했습니다. 갑자기 요새 일이 몰리면서 글을 제대로 쓰질 못했네요. 죄송. ㅎㅎ;; 오랜만에 쓰는 글이지만 기존 글에 이어집니다. 물론 국가가 바뀌었으니 글이 달라지긴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제 아이디 클릭하시고 게시물 보기 한번쯤 눌러주시는 편이 이해하시기엔 더 편하지 않을까 하네요. 뭐, 원하시는 분만 그러시면 되는 거고. 저야 글이나 쓰면 되는 거고. 아, 예. 음. 아, 참고로 마지막 글일 줄 알았는데, 호족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미비된 부분이 있어요. 다음 글에서 총정리 겸사겸사 다뤄보지 않을까 하네요.

 

어쨌든, 시작합니다.

 

 

 

전번 글에서 조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했었는데요. 사실 조씨 집안도 꽤나 이름 높은 집안이긴 했지만, 그 본질을 따지면 엄연히 탁류입니다. 창업자인 조조 자신도 환관 조등의 손자였죠.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욱 더 그들의 움직임이 호족 지향적, 유가 및 덕정 지향적이기보다는 군주 지향적, 법가 및 맹정 지향적이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새롭게 권력을 쥐게 된 사마씨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르고, 이것은 이후 정치 판도에서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을 야기합니다.

 

이것은 사실 성에서부터 나타나는데요. "사마"라는 말을 성씨 말고도 어디서 들어보신 기억이 있을 겁니다. 예, 바로 관직입니다. 본래 성씨라는 것은 서구에서도 그랬고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귀족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은주 시대 봉토를 받았던 봉건 제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성씨였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어찌어찌 하는 과정 중에 하나둘 성씨를 가지게 됩니다. 봉토를 받은 이들이 늘어난 것도 있지만, 그 외에도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둘 성씨를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뭐, 꽤나 복잡한 이야기니 대충 생략하겠습니다만, 이 과정에서 많이 쓰였던 것이 사는 지역, 또는 대대로 물려받은 직함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사마"라는 성씨 또한 여기서 유래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사마"입니다. 사마는 단순한 관료가 아닙니다. 막부 체제 하에 있는 막료직 중 하나죠. 예전 보정 글에서 말씀드린 적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막료직이라는 것은 결국 당시의 호족 사대부들의 근간이 되는 직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마씨는 이 직함을 대대손손 물려받다 못해 성씨로까지 쓰고 있던 이들입니다. 그 뜻은? 이들은 뿌리부터 호족 사대부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번 글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사마 씨는 당시 지역사회의 대호족을 넘어서서 조위 호족 세력의 우두머리격에 속하던 집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권력을 잡는 과정도 이러한 호족 세력들의 지지를 얻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죠.

 

어쨌든 이런 사마씨 정권이 드디어 권력을 장악했고, 사마염은 선양을 통해 조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인 "진"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정권은, 철저히 호족 지향적입니다. 그리고 이 호족 지향적이란 말은 곧 봉건적이라는 말이며, 유가적이라는 말과 통하게 되겠지요. 즉 진의 등장은 기존 진황-한무-조위로 이어지는 군현제 체제,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로부터 시작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 제민정치 구도의 실패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후로도 그러한 시도들이 한번씩 계속 나오기는 합니다만, 단지 나오기만 할 뿐입니다.

 

 

서진의 정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군국제의 선언입니다. 서진 시대에는 사실상 폐기되어 명예직에 불과했던 왕, 공의 직위가 다시금 주대나 전한 초기 수준까지 올라가며, 각 지역은 이 시기 임명된 왕들이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말이 군국제라 사람들이 자주 착각합니다만, 군국제는 봉건제랑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시스템이죠. 어쨌든 봉건 체제가 다시 돌아왔고, 각 지역에는 사마씨를 가진 황족들이 왕으로 임명되어 봉지를 지킵니다. 중앙의 황제를 중심으로 왕들이 울타리처럼 지키고 있는 형국이 되는 것이죠. 주대, 전한대 그대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나올 성도 싶습니다. 호족 정치라는데 본래의 호족 집단이 아니라 왕위를 사마씨가 다 차지하면 결국 별 차이가 없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죠. 사실 그래 보입니다만, 이것은 예전 보정 글에서 말씀드렸던 막부 체제와 관련하여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호족 사대부에게 필요한 것은 관직으로 나갈 수 있는 길입니다. 사대부는 유가에 대한 숭상을 하며, 유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입신양명하여 경국안민하는 것입니다. 즉, 관직으로 나가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치자의 입장이 되고, 황제를 돕는 보좌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황제의 절대권을 중시하는 군현제에서는 관료는 단지 황제의 수족일 뿐입니다. 그나마 황제 중심의 몇몇밖에 자리가 없죠. 하지만 봉건제는 다릅니다. 각각의 왕이 모두 관료를 뽑을 수 있으니 일단 자리가 넓어지고, 황제-왕으로 이어지는 계급제 사회가 이미 성립했으니 자신들이 관료로서 그들과 민 사이의 중간자적 계급 형성이 가능합니다.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죠. 또한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유가의 시조 공자가 모시는 인물이 곧 주공 단이요, 주공 단이 세운 체제가 바로 봉건제입니다. 봉건제의 실행은 유가 입장에서는 그것이 비록 황족들에게 왕위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모든 부분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봉건제 체제는 국가 이데올로기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지난번 글에서 나왔던 조상의 실패와도 연관성이 있습니다. 사실 조상이 협천자의 상태였음에도 대처하지 못했던 가장 큰 까닭이 황실 자체가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 외부에서 군사력을 끌어올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만약 사마씨에게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봉건제에서는 간단합니다. 주변 제후들에게 의지해서 대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런 복합적인 측면 하에, 봉건제가 부활한 것입니다.

 

 

이데올로기 측면 얘기한 김에 또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효"입니다. 유가에서 가장 중시하는 덕목은 무엇일까요? 바로 충, 효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덕목으로 보기 이전에 유가의 시스템적 문제입니다. 유가는 계급제 사회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이 계급제를 유지하기 위한 덕목으로 자신보다 상위 계급에 대한 존경과 존중을 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유가의 계급제 사회는 온정적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합니다. 수신이 이뤄진 후에는 아버지로서의 제가, 아버지와 같은 군주로서의 치국, 더 나아가 평천하에 이르는 모든 구도는 아버지와 아들들, 가족제 체제에서 비롯됩니다. 이 과정에서 효가 중시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봐야겠죠. 게다가 서진은 기존 국가를 뒤엎었고, 그 과정에서 심지어 군주를 살해하기까지 했던 전력(폐제 조모 살해사건)을 가지고 있는 국가였습니다. 그렇기에 충은 내세우기가 왠지 꺼림칙한 가치였고, 이 과정에서 효가 매우 중시됩니다.

 

인간적으로 효가 중요한 것이니 중시했던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효는 충분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기의 효에 대한 강조는 철저히 국가 이데올로기적 측면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무제가 효행을 중시하여 장례간 검소한 모습을 보였다지만, 낮과 밤이 다르다고 표현할 정도의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즉 무제가 정말로 효성스러워서 효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후 무제가 방탕해지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황제가 되서 폭주한 게 아니라, 그 전에 필요에 의해 숨겼다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죠.

 

어쨌건 이러한 계급제를 반영, 서진에서는 오등작제가 본격적으로 부활하기도 합니다.

 

 

자, 주절주절 떠들었지만 결국 확실한 것은, 드디어 기존 황제 절대 체제가 붕괴하고 호족 중심의 국가로 국가가 재편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게 2대가 못 가서 일이 터지고 맙니다. 왜 항상 2대 황제는 병... 음. 정치를 실패할까요. 전한대 혜제 유영이 실패한 것은 여후라는 강력한 태후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보다 윗대, 험한 난세를 거쳐온 상대였고 어머니기에 대항하기 어려운 상대라는 측면이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아내인 가남충입니다. 한혜제의 불리점도 없는데 왜? ...이번엔 굳이 말 숨길 필요 없겠습니다, 솔직히. 혜제 사마충은 정말 지적 장애가 있었으니까요. 유선 같은 농담조의 장애 수준이 아닌 진짜 장애 말입니다. 물론 추정이긴 합니다만, 신하들이 태자 교체를 논할 정도였으니 상태가 좀 심각하긴 했던 듯 싶습니다. 여튼 그 통에, 무제는 혜제가 나이는 분명 성인임에도 보정을 두는 파격적 인사를 단행합니다.

 

근데 보정을 누가 하느냐.... 일단 무제가 가장 총애하는 대신, 진 건국의 1등 공신이라 하면 삼국지 보신 분이라면 한번은 들어보셨을 가충이겠습니다. 혜제의 장인이기도 하죠. 당연히 보정도 가충이 맡는 것이 가장 맞겠습니다만, 문제는 이미 고인이 된 몸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황비 가남풍의 야심이 만만찮아, 가씨 집안의 급격한 성장도 견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결국 황제는 가씨 집안이 아닌 타 세력, 자신의 장인이었던 양준을 보정으로 임명하면서, 견제의 수를 던집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 글을 보신 분들은 어느 정도 느끼셨을 수도 있겠지만, 견제란 것은 중앙이 서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는 겁니다. 중앙에서의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견제는 순식간에 한쪽으로 세력이 넘어갈 수 있고, 동시에 그 과정에서 피바람이 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뭐, 안 하는 것보담야 그나마 좀 더 나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견제가 그렇게까지 효용을 가지는 방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거죠. 그리고 이번에도, 아니 이번에는 정말로 중앙, 즉 황제가 부실하기 그지 없는 상태입니다. 당연히 피바람이 일어나고야 맙니다. 바로 팔왕의 난입니다.

 

 

팔왕의 난의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야 검색해보면 대충 다 나오는 것이니 생략하겠습니다만, 중국 황제 체제에서의 황족 개념의 특수성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삼국지를 보신 분이라면 유비의 황숙황숙 드립을 워낙 보시다 보니, 황족이라는 것을 약간은 고귀하고 충정 어린 이미지로 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황족이야말로 국가 권력 최대의 위협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치는 건 역성혁명이지만 황족이 황제를 치는 건 황실 내부 갈등이며, 그 황족이 황제가 된다 해도 어느 정도의 정통성은 보유할 수 있습니다. 즉, 더 쉬운 공략이 가능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족적 특성상 동족이라는, 희한한 구도가 성립됩니다.

 

이것이 중국 황제 체제에서 교묘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대홍려의 역할입니다. 대홍려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타국이나 조공국들의 외교 사절들을 접대하는, 즉 외교부의 역할을 수행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황족의 접대 또한 대홍려에서 담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엄연히 국내의 인물이고 가족인 황족입니다만, 정작 접대는 외교부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것의 유래는 주대 봉건 제후의 접대에서 유래한 것이기는 합니다. 봉건 제후 또한 황족들이었지만 동시에 완전히 소속됐다고 말하기는 힘든, 타국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황족이란 가장 친밀한 관계지만 동시에 타인이며, 국가의 중진이자 든든한 아군이지만 동시에 본국을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적군의 성격을 지닌 이중적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홍려가 여전히 황족들의 접대를 담당했다는 것은 주대부터 내려온 전통에 기인하지만, 동시에 이런 측면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팔왕의 난은 이러한 황족의 이중적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숱한 황족들이 궁성으로 진격해와 보정직을 탐하였고, 다시 또 들어오는 황족에 의해 살해당하는 과정. 사실 팔왕의 난 자체는 진이라는 통일국가의 멸망을 일으킨 직접적 사건은 아닙니다. 그저 궁중 내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졌던 정변일 뿐이죠. 그러나 이러한 내란 과정 중 각 봉건 제후들이 자신의 수하에 있던, 또는 자신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던 병력들을 끌어오게 되는데, 이것이 남흉노로 대표되는 이민족 세력들이 유입되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촉발시킨 영가의 난을 기점으로, 서진은 그 힘을 잃고 멸망의 길을 맞이합니다. 이민족 이야기는 이제 삼국지를 벗어나는 판국이 될 것 같으니 언젠가 할 기회가 있으면 하고, 이번 글에서는 생략합니다.

 

여하튼 서진 정권이 보여준 결론은 간단합니다. 호족 사회가 그토록 바랬던 봉건 제후의 부활조차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황제와 황실 내부의 봉건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밑의 호족 사회는 전혀 붕괴하지 않고 유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영가의 난을 기점으로 기존 호족 사회는 대부분 남조로의 도피 과정 등 대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시스템이 유지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후 이민족 유입 과정에서 이 시스템은 이민족 내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민족 사회가 본래 부족 사회 형태로 되어 있다 보니 적용이 더 쉬웠을 것도 있겠지만, 이민족의 한화 정책과 유학의 장려 등이 얽히면서 이민족 귀족층은 이 시대 호족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가게 됩니다. 결국 이 시스템이 관농집단이라는 토착화된 선비 귀족층을 낳았고, 그것이 결국 북위를 거쳐 수당대에 이르는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으니까요.

 

특히 보정-선양으로 이어지는 체제가 지속되면서 귀족층은 숙청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성장해왔으며, 더 이상 황제는 귀족층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과 비교하여 나을 게 없는, 이름만이 황제인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당태종이 간언을 잘 들었던 것은 그런 총명함의 문제 이전에,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결국 수당대는 더 이상 황제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황제 밑에 있는 귀족들이 지배하는 귀족사회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러한 체제는 당태종의 개혁으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당대 초중기를 계속해서 지배하는 체제로 자리잡았고, 측천무후와 당현종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문 세력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그러들게 됩니다. 더 이상 황제권이 중심이 아닌 시대, 호족 사대부라 불리는 세력이 지배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죠. 조위가 유도했던 황제 중심의 천칭 체제, 서진이 유도했던 황족 봉건과 호족의 보좌 체제 모두가 붕괴하고, 진짜 말 그대로 호족이 전국을 장악하는 시대가 되서야 혼란이 종식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황제와 호족, 즉 기득권 간의 투쟁은 사실 끊임없는 싸움이었습니다. 황제는 기득권의 지지를 필요로 했지만 동시에 그들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득권은 정당성의 문제 때문에 황제를 필요로 했지만 동시에 황제가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자신들을 누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진한대부터 수당대에 이르기까지 수백년간의 역사는 이 둘 간의 투쟁으로 점철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환관, 외척 등 수많은 세력들이 기득권의 견제 세력으로, 한편으로는 기득권에 영합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고 사라져갔던 것이 이 시대의 중국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결말은 기득권층, 호족층의 승리로 결론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능하다, 유약하다, 고집이 세다 하던 수많은 황제와 군웅들의 뒷면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민했고 실패해왔던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 인물이 무능한지, 아집에 가득차서 그랬던 건지, 그가 폭군이었는지 등등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역사적 체제를 먼저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글을 이제 앞두고 있네요. 마지막 글에서는 호족 체제의 사상 등에 대해 다뤄볼까 하는데.... 정치판이 아니라 재미가 없을려나요. ㅎㅎ; 어쨌든 정치 이야기는 이번 글로 종결입니다. 이미 서진도 멸망해버렸는데 더 나가다간 중국 역사 통째로 훑어야 되니. 지금까지 긴 글 열심히 따라와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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