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마지막회가 아니십니다. 하지만 다음은 진짜 마지막이에요.

 

 

격조했습니다. 갑자기 요새 일이 몰리면서 글을 제대로 쓰질 못했네요. 죄송. ㅎㅎ;; 오랜만에 쓰는 글이지만 기존 글에 이어집니다. 물론 국가가 바뀌었으니 글이 달라지긴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제 아이디 클릭하시고 게시물 보기 한번쯤 눌러주시는 편이 이해하시기엔 더 편하지 않을까 하네요. 뭐, 원하시는 분만 그러시면 되는 거고. 저야 글이나 쓰면 되는 거고. 아, 예. 음. 아, 참고로 마지막 글일 줄 알았는데, 호족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미비된 부분이 있어요. 다음 글에서 총정리 겸사겸사 다뤄보지 않을까 하네요.

 

어쨌든, 시작합니다.

 

 

 

전번 글에서 조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했었는데요. 사실 조씨 집안도 꽤나 이름 높은 집안이긴 했지만, 그 본질을 따지면 엄연히 탁류입니다. 창업자인 조조 자신도 환관 조등의 손자였죠.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욱 더 그들의 움직임이 호족 지향적, 유가 및 덕정 지향적이기보다는 군주 지향적, 법가 및 맹정 지향적이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새롭게 권력을 쥐게 된 사마씨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르고, 이것은 이후 정치 판도에서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을 야기합니다.

 

이것은 사실 성에서부터 나타나는데요. "사마"라는 말을 성씨 말고도 어디서 들어보신 기억이 있을 겁니다. 예, 바로 관직입니다. 본래 성씨라는 것은 서구에서도 그랬고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귀족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은주 시대 봉토를 받았던 봉건 제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성씨였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어찌어찌 하는 과정 중에 하나둘 성씨를 가지게 됩니다. 봉토를 받은 이들이 늘어난 것도 있지만, 그 외에도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둘 성씨를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뭐, 꽤나 복잡한 이야기니 대충 생략하겠습니다만, 이 과정에서 많이 쓰였던 것이 사는 지역, 또는 대대로 물려받은 직함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사마"라는 성씨 또한 여기서 유래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사마"입니다. 사마는 단순한 관료가 아닙니다. 막부 체제 하에 있는 막료직 중 하나죠. 예전 보정 글에서 말씀드린 적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막료직이라는 것은 결국 당시의 호족 사대부들의 근간이 되는 직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마씨는 이 직함을 대대손손 물려받다 못해 성씨로까지 쓰고 있던 이들입니다. 그 뜻은? 이들은 뿌리부터 호족 사대부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번 글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사마 씨는 당시 지역사회의 대호족을 넘어서서 조위 호족 세력의 우두머리격에 속하던 집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권력을 잡는 과정도 이러한 호족 세력들의 지지를 얻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죠.

 

어쨌든 이런 사마씨 정권이 드디어 권력을 장악했고, 사마염은 선양을 통해 조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인 "진"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정권은, 철저히 호족 지향적입니다. 그리고 이 호족 지향적이란 말은 곧 봉건적이라는 말이며, 유가적이라는 말과 통하게 되겠지요. 즉 진의 등장은 기존 진황-한무-조위로 이어지는 군현제 체제,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로부터 시작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 제민정치 구도의 실패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후로도 그러한 시도들이 한번씩 계속 나오기는 합니다만, 단지 나오기만 할 뿐입니다.

 

 

서진의 정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군국제의 선언입니다. 서진 시대에는 사실상 폐기되어 명예직에 불과했던 왕, 공의 직위가 다시금 주대나 전한 초기 수준까지 올라가며, 각 지역은 이 시기 임명된 왕들이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말이 군국제라 사람들이 자주 착각합니다만, 군국제는 봉건제랑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시스템이죠. 어쨌든 봉건 체제가 다시 돌아왔고, 각 지역에는 사마씨를 가진 황족들이 왕으로 임명되어 봉지를 지킵니다. 중앙의 황제를 중심으로 왕들이 울타리처럼 지키고 있는 형국이 되는 것이죠. 주대, 전한대 그대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나올 성도 싶습니다. 호족 정치라는데 본래의 호족 집단이 아니라 왕위를 사마씨가 다 차지하면 결국 별 차이가 없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죠. 사실 그래 보입니다만, 이것은 예전 보정 글에서 말씀드렸던 막부 체제와 관련하여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호족 사대부에게 필요한 것은 관직으로 나갈 수 있는 길입니다. 사대부는 유가에 대한 숭상을 하며, 유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입신양명하여 경국안민하는 것입니다. 즉, 관직으로 나가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치자의 입장이 되고, 황제를 돕는 보좌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황제의 절대권을 중시하는 군현제에서는 관료는 단지 황제의 수족일 뿐입니다. 그나마 황제 중심의 몇몇밖에 자리가 없죠. 하지만 봉건제는 다릅니다. 각각의 왕이 모두 관료를 뽑을 수 있으니 일단 자리가 넓어지고, 황제-왕으로 이어지는 계급제 사회가 이미 성립했으니 자신들이 관료로서 그들과 민 사이의 중간자적 계급 형성이 가능합니다.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죠. 또한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유가의 시조 공자가 모시는 인물이 곧 주공 단이요, 주공 단이 세운 체제가 바로 봉건제입니다. 봉건제의 실행은 유가 입장에서는 그것이 비록 황족들에게 왕위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모든 부분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봉건제 체제는 국가 이데올로기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지난번 글에서 나왔던 조상의 실패와도 연관성이 있습니다. 사실 조상이 협천자의 상태였음에도 대처하지 못했던 가장 큰 까닭이 황실 자체가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 외부에서 군사력을 끌어올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만약 사마씨에게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봉건제에서는 간단합니다. 주변 제후들에게 의지해서 대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런 복합적인 측면 하에, 봉건제가 부활한 것입니다.

 

 

이데올로기 측면 얘기한 김에 또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효"입니다. 유가에서 가장 중시하는 덕목은 무엇일까요? 바로 충, 효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덕목으로 보기 이전에 유가의 시스템적 문제입니다. 유가는 계급제 사회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이 계급제를 유지하기 위한 덕목으로 자신보다 상위 계급에 대한 존경과 존중을 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유가의 계급제 사회는 온정적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합니다. 수신이 이뤄진 후에는 아버지로서의 제가, 아버지와 같은 군주로서의 치국, 더 나아가 평천하에 이르는 모든 구도는 아버지와 아들들, 가족제 체제에서 비롯됩니다. 이 과정에서 효가 중시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봐야겠죠. 게다가 서진은 기존 국가를 뒤엎었고, 그 과정에서 심지어 군주를 살해하기까지 했던 전력(폐제 조모 살해사건)을 가지고 있는 국가였습니다. 그렇기에 충은 내세우기가 왠지 꺼림칙한 가치였고, 이 과정에서 효가 매우 중시됩니다.

 

인간적으로 효가 중요한 것이니 중시했던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효는 충분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기의 효에 대한 강조는 철저히 국가 이데올로기적 측면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무제가 효행을 중시하여 장례간 검소한 모습을 보였다지만, 낮과 밤이 다르다고 표현할 정도의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즉 무제가 정말로 효성스러워서 효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후 무제가 방탕해지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황제가 되서 폭주한 게 아니라, 그 전에 필요에 의해 숨겼다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죠.

 

어쨌건 이러한 계급제를 반영, 서진에서는 오등작제가 본격적으로 부활하기도 합니다.

 

 

자, 주절주절 떠들었지만 결국 확실한 것은, 드디어 기존 황제 절대 체제가 붕괴하고 호족 중심의 국가로 국가가 재편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게 2대가 못 가서 일이 터지고 맙니다. 왜 항상 2대 황제는 병... 음. 정치를 실패할까요. 전한대 혜제 유영이 실패한 것은 여후라는 강력한 태후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보다 윗대, 험한 난세를 거쳐온 상대였고 어머니기에 대항하기 어려운 상대라는 측면이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아내인 가남충입니다. 한혜제의 불리점도 없는데 왜? ...이번엔 굳이 말 숨길 필요 없겠습니다, 솔직히. 혜제 사마충은 정말 지적 장애가 있었으니까요. 유선 같은 농담조의 장애 수준이 아닌 진짜 장애 말입니다. 물론 추정이긴 합니다만, 신하들이 태자 교체를 논할 정도였으니 상태가 좀 심각하긴 했던 듯 싶습니다. 여튼 그 통에, 무제는 혜제가 나이는 분명 성인임에도 보정을 두는 파격적 인사를 단행합니다.

 

근데 보정을 누가 하느냐.... 일단 무제가 가장 총애하는 대신, 진 건국의 1등 공신이라 하면 삼국지 보신 분이라면 한번은 들어보셨을 가충이겠습니다. 혜제의 장인이기도 하죠. 당연히 보정도 가충이 맡는 것이 가장 맞겠습니다만, 문제는 이미 고인이 된 몸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황비 가남풍의 야심이 만만찮아, 가씨 집안의 급격한 성장도 견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결국 황제는 가씨 집안이 아닌 타 세력, 자신의 장인이었던 양준을 보정으로 임명하면서, 견제의 수를 던집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 글을 보신 분들은 어느 정도 느끼셨을 수도 있겠지만, 견제란 것은 중앙이 서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는 겁니다. 중앙에서의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견제는 순식간에 한쪽으로 세력이 넘어갈 수 있고, 동시에 그 과정에서 피바람이 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뭐, 안 하는 것보담야 그나마 좀 더 나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견제가 그렇게까지 효용을 가지는 방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거죠. 그리고 이번에도, 아니 이번에는 정말로 중앙, 즉 황제가 부실하기 그지 없는 상태입니다. 당연히 피바람이 일어나고야 맙니다. 바로 팔왕의 난입니다.

 

 

팔왕의 난의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야 검색해보면 대충 다 나오는 것이니 생략하겠습니다만, 중국 황제 체제에서의 황족 개념의 특수성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삼국지를 보신 분이라면 유비의 황숙황숙 드립을 워낙 보시다 보니, 황족이라는 것을 약간은 고귀하고 충정 어린 이미지로 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황족이야말로 국가 권력 최대의 위협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치는 건 역성혁명이지만 황족이 황제를 치는 건 황실 내부 갈등이며, 그 황족이 황제가 된다 해도 어느 정도의 정통성은 보유할 수 있습니다. 즉, 더 쉬운 공략이 가능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족적 특성상 동족이라는, 희한한 구도가 성립됩니다.

 

이것이 중국 황제 체제에서 교묘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대홍려의 역할입니다. 대홍려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타국이나 조공국들의 외교 사절들을 접대하는, 즉 외교부의 역할을 수행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황족의 접대 또한 대홍려에서 담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엄연히 국내의 인물이고 가족인 황족입니다만, 정작 접대는 외교부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것의 유래는 주대 봉건 제후의 접대에서 유래한 것이기는 합니다. 봉건 제후 또한 황족들이었지만 동시에 완전히 소속됐다고 말하기는 힘든, 타국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황족이란 가장 친밀한 관계지만 동시에 타인이며, 국가의 중진이자 든든한 아군이지만 동시에 본국을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적군의 성격을 지닌 이중적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홍려가 여전히 황족들의 접대를 담당했다는 것은 주대부터 내려온 전통에 기인하지만, 동시에 이런 측면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팔왕의 난은 이러한 황족의 이중적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숱한 황족들이 궁성으로 진격해와 보정직을 탐하였고, 다시 또 들어오는 황족에 의해 살해당하는 과정. 사실 팔왕의 난 자체는 진이라는 통일국가의 멸망을 일으킨 직접적 사건은 아닙니다. 그저 궁중 내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졌던 정변일 뿐이죠. 그러나 이러한 내란 과정 중 각 봉건 제후들이 자신의 수하에 있던, 또는 자신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던 병력들을 끌어오게 되는데, 이것이 남흉노로 대표되는 이민족 세력들이 유입되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촉발시킨 영가의 난을 기점으로, 서진은 그 힘을 잃고 멸망의 길을 맞이합니다. 이민족 이야기는 이제 삼국지를 벗어나는 판국이 될 것 같으니 언젠가 할 기회가 있으면 하고, 이번 글에서는 생략합니다.

 

여하튼 서진 정권이 보여준 결론은 간단합니다. 호족 사회가 그토록 바랬던 봉건 제후의 부활조차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황제와 황실 내부의 봉건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밑의 호족 사회는 전혀 붕괴하지 않고 유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영가의 난을 기점으로 기존 호족 사회는 대부분 남조로의 도피 과정 등 대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시스템이 유지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후 이민족 유입 과정에서 이 시스템은 이민족 내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민족 사회가 본래 부족 사회 형태로 되어 있다 보니 적용이 더 쉬웠을 것도 있겠지만, 이민족의 한화 정책과 유학의 장려 등이 얽히면서 이민족 귀족층은 이 시대 호족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가게 됩니다. 결국 이 시스템이 관농집단이라는 토착화된 선비 귀족층을 낳았고, 그것이 결국 북위를 거쳐 수당대에 이르는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으니까요.

 

특히 보정-선양으로 이어지는 체제가 지속되면서 귀족층은 숙청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성장해왔으며, 더 이상 황제는 귀족층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과 비교하여 나을 게 없는, 이름만이 황제인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당태종이 간언을 잘 들었던 것은 그런 총명함의 문제 이전에,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결국 수당대는 더 이상 황제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황제 밑에 있는 귀족들이 지배하는 귀족사회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러한 체제는 당태종의 개혁으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당대 초중기를 계속해서 지배하는 체제로 자리잡았고, 측천무후와 당현종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문 세력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그러들게 됩니다. 더 이상 황제권이 중심이 아닌 시대, 호족 사대부라 불리는 세력이 지배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죠. 조위가 유도했던 황제 중심의 천칭 체제, 서진이 유도했던 황족 봉건과 호족의 보좌 체제 모두가 붕괴하고, 진짜 말 그대로 호족이 전국을 장악하는 시대가 되서야 혼란이 종식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황제와 호족, 즉 기득권 간의 투쟁은 사실 끊임없는 싸움이었습니다. 황제는 기득권의 지지를 필요로 했지만 동시에 그들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득권은 정당성의 문제 때문에 황제를 필요로 했지만 동시에 황제가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자신들을 누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진한대부터 수당대에 이르기까지 수백년간의 역사는 이 둘 간의 투쟁으로 점철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환관, 외척 등 수많은 세력들이 기득권의 견제 세력으로, 한편으로는 기득권에 영합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고 사라져갔던 것이 이 시대의 중국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결말은 기득권층, 호족층의 승리로 결론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능하다, 유약하다, 고집이 세다 하던 수많은 황제와 군웅들의 뒷면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민했고 실패해왔던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 인물이 무능한지, 아집에 가득차서 그랬던 건지, 그가 폭군이었는지 등등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역사적 체제를 먼저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글을 이제 앞두고 있네요. 마지막 글에서는 호족 체제의 사상 등에 대해 다뤄볼까 하는데.... 정치판이 아니라 재미가 없을려나요. ㅎㅎ; 어쨌든 정치 이야기는 이번 글로 종결입니다. 이미 서진도 멸망해버렸는데 더 나가다간 중국 역사 통째로 훑어야 되니. 지금까지 긴 글 열심히 따라와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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