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시엘님의 삼국지설명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2. 유비가 삼고초려로 얻은 것은 제갈량이 아니었다

 

요새 기획 컨셉 같은 쪽을 공부하다 보니 충격적인 말부터 던지는 게 취미가 된 듯합니다. 대체 그럼 뭘 얻었다는 소리냐. 제갈량이 사실 제갈량이 아니라 제갈령이었냐. 뭐, 솔직히 말하면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제갈량이 삼고초려로 나온 건 맞죠. 그럼 저건 무슨 개소리냐. 간단하게 말하자면, 단순히 제갈량을 얻었기에 유비가 그렇게 강성해졌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제갈량을 얻은 이후 유비 세력이 대전환을 이룬 만큼, 제갈량은 대단한 전략가인 것이 분명하다. 뭐, 틀린 말이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제갈량 좋아하고 참 괴물 같은 인간이다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확실한 전략가, 기획가 한 명이 미치는 영향력 또한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제갈량 한 명이 과연 유비 세력을 통째로 바꿔놓았다는 게 가능한가의 문제이며 가능하다면 어째서 그것이 가능한가입니다.

 

약간 거슬러 올라가보죠. 왜 조조는 강할까요? 그냥 조조가 잘나서?

 

조조 또한 유비와 같은 시기가 있었고 그 세력은 갑작스러운 변혁기를 맞습니다. 이 또한 한 인물의 등장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는데요. 바로 순욱입니다. 삼국지연의 정도만 보셔도 알겠지만, 조조 군에 순욱이 들어온 이후 희한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순욱이 들어오고 얼마 안 있어 누굴 물어오고, 그 누구가 또 누굴 물어오고, 그 누구가 또 누굴  물어옵니다. 정욱, 곽가, 모개, 만총 등등 위나라의 기틀을 다진 인물들이 이 시기 조조군에 갑자기 막 유입되고 이름 있는 장수 수만 따져도 조조군이 두배에서 세배 이상 껑충 뛰어오릅니다. 삼국지 11에서 순욱이 안력을 가질 만한 부분이죠.

 

근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순욱의 능력이 출중해서? 뭐, 조조가 자신의 자방이라 표현할 정도니 출중한 건 사실이겠습니다만, 바로 이 현상이 유비가 제갈량을 얻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과 유사합니다. 손책 군도 마찬가지죠. 주유가 들어오고 장소와 장굉, 노숙, 제갈근 등등이 줄기차게 들어옵니다. 왜일까요? 바로 이것이 호족이란 체제의 특성이었습니다.

 

 

후한 말, 십상시를 대표격으로 하는 환관 세력의 대두는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예전 보정 체제에 대해서 글 쓴 걸 기억하실 텐데요. 보정은 분명 한시적인 제도이지만 그 세력이 강해지면서 이젠 오히려 황제의 권력과 쳠예한 대립각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특히 이것이 극에 달한 시기가 바로 후한 화제 시기입니다. 전대 황제였던 명제는 황제권의 강화를 실시하고 어느 정도의 평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만, 유언할 틈도 없이 사망하면서 제대로 된 보정을 두지 못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태후의 임조칭제가 실시되고, 보정의 필요에 따라 외척이었던 두헌을 보정으로 세우게 됩니다. 외척의 보정화 성향이 나타난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헌은 패부 경향이 강한 인물이었고, 보정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기에 이르죠. 그리고 화제는 결국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 친위 쿠데타를 성공, 두씨 일족을 제거하고 친정 체제를 확립합니다.

 

근데 이 시기 화제가 선택한 아군이 바로 환관이었습니다. 왜 하필 환관일까요? 모두들 환관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사실 황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환관은 가장 든든한 아군입니다. 신하들은 호족으로 지방에 기반을 둔, 아군이지만 동시에 불안 요소를 가진 적이기도 합니다. 외척은 지금 공격해야 할 대상이지요. 하지만 환관은 오직 황제에게만 귀속되어 있는 이들이며, 황제 없이는 어떤 힘도 가지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엄연히 황제의 수족이자 사노비입니다. 그렇기에 황제가 뭔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건 바로 환관이었습니다.

 

어쨌건 친위 쿠데타는 성공했고, 이때부터 환관과 외척 간의 대립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환관과 외척의 대립은 단순히 환관과 외척의 대립 이전에, 황제의 친위 세력과 호족 사대부들의 우두머리 세력 간의 대립이기도 합니다. 즉 황제와 호족의 대립의 표면적 상태가 바로 환관과 외척의 대립이죠. 그 중 누가 옳은 걸까요? 솔직히 말해서, 정당성은 황제 쪽에 있는 것이 맞습니다. 환관은 사실 욕먹을 짓한 게 아닙니다. 황제를 대신해서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호족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이건 자신들에 대한 공격이고, 따라서 욕합니다. 그렇다고 황제를 욕할 수는 없습니다. 역적으로 몰려도 할말 없죠, 그랬다간. 그럼 어떻게 할까요? 환관을 욕하는 거죠. 이것이 바로 청류와 탁류의 대립입니다.

 

보통 청류라 하면 고귀하고 정치 잘 했던 애들이고 탁류라 하면 썩은 애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거야말로 바로 "승자의 역사"의 표본입니다. 사실 이 싸움은 밥그릇 싸움입니다. 환관은 사대부들과 대립하기 위해 자신과 친분이 있고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세력들을 계속 끌어들입니다. 대항을 위한 자본 축적을 위한 착취도 지속되죠. 호족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하는 짓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죽어나는 건 백성들이죠. 이 과정에서 점차 농민들의 삶은 파탄 지경에 이르고, 결국 이것이 황건적의 난이라는 극단적 형태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황건의 난 이전에, 이 호족 세력 문제 때문에 다른 큰 문제가 벌어집니다. 바로 "당고"입니다. 탁류층 인사들이 청류측 인사들을 "파당"을 조성한다 하여 고발하고, 그래서 황제가 이들을 파직하거나 죽여 없애고 그들이 관직에 나올 기회를 박탈한 것이 바로 당고입니다. 창천항로를 보신 분이라면 당고를 모두 아실 겁니다. 장한의 사연은 참 애틋하죠. 하지만 정말 애틋할까요? 이건 사실 누가 잘하고 못했다가 아니라 이러한 밥그릇 싸움이 극단적으로 치달아서 한쪽이 한쪽을 친 사건에 불과합니다.

 

사실 파당이라는 것은 지금의 정당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법가 질서에서, 황제는 오직 유일한 존재이며 그 아래의 모두는 평등합니다. 그들이 하나의 단체를 만든다는 것은 황제에 대한 대항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은 역모에 해당하는 중범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호족 사회가 기본적으로 네트워크로 이뤄진 사회라는 겁니다. 한대의 정치 체제 자체가 향거리선제라는 추천제를 기반으로 서로가 밀어주고 끌어주는 인적 체제이며, 모두가 스승이니 제자니 하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거죠. 이것은 청류든 탁류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당고는 가장 상대를 치기 좋은 수단이면서 대신 자신들도 공격당할 수 있으니 위험 부담이 큰 양날의 칼이었습니다. 그러나 두무 보정 시기 청류파의 세력이 너무 강해지면서, 탁류가 선택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던 거죠.

 

어쨌든 이 사건을 기반으로 청류파는 상당 부분 와해되고 조정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온건파 청류들은 탁류와 어떻게든 공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상당수의 청류는 지방으로 낙향합니다. 그러나 어찌 됐건 이들은 호족이에요. 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고, 조정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그들이 끝장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지방을 근거로 하여 더욱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유력한 호족들은 서로 연결고리를 강하게 형성하게 되고, 각지에는 단단한 네트워크망으로 구성된 호족 파벌들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 호족 파벌 내에서 힘을 가르게 되는 것은 다른 호족들의 평가였습니다. 이것이 인물평이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어떻게든 유력자가 자신에 대해 비평한 인물평을 얻고 싶어했고, 기왕이면 더 좋은 평을 얻고 싶어합니다. 인물평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 호족 사회에 편입된다는 의미를 가지니까요. 조조가 왜 그렇게 허소를 쫓아다녀서 인물평을 얻고자 했을까요? 조조는 본래 탁류입니다. 환관의 양자의 아들이었으니 누가 봐도 탁류입니다. 그러나 그가 보았을 때, 단지 중앙을 장악하고 있던 탁류들의 힘만으로는 딱히 뭔가 해낼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동시에 명망이란 측면에서도 청류에 포함되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청류의 유력자 중 한명이었던 허소를 그토록 쫓아다녀서 "치세능신, 난세간웅"이란 평을 얻어야 했던 것입니다.

 

원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원소를 사세삼공 어쩌고 하면서 청류파의 수장격으로 보지만, 이것은 원소가 그토록 연출하고 싶었던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원씨는 청류긴 했지만 탁류에 우호적이었고 그에 붙어서 삼공이란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회색 세력이었고 상당히 많은 비난 속에 있던 세력이었습니다. 게다가 원소 자신은 서자이며 어머니는 노비였습니다. 비록 이 시기의 서자가 이후처럼 그렇게 천대받던 이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자에 비해 대접받았냐면 그것도 역시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원소는 소싯적부터 인맥과 경력 구축, 청렴한 이미지 구축 등 많은 부분을 신경썼고, 그 결과 그는 마치 청류파의 수장과 같은 이미지로 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결과로 원소는 관도대전 이전까지 하북 최강의 군웅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원소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제갈량의 결혼 또한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황씨의 미모는 차치하고, 황승언은 그 시기 형주 지역의 가장 유력한 명사 중 한명이었습니다. 반면 제갈씨는 본래 산동 지방 쪽에 소재를 두고 어쩌다 보니 밀려온 떨거지, 몰락 호족에 가까웠죠. 그의 결혼은 형주 호족들의 인적 네트워크로의 합류였으며, 그는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그 지역 호족 젊은 층의 수장격으로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서서나 제갈량의 친구로 등장하는 석광원, 최주평 등은 물론 마량, 마속, 장완 등등 수많은 이들이 제갈량과 인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었던 것은 바로 그의 결혼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어쨌건 네트워크가 구축되었고, 이제 중요한 것은 이 네트워크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제갈량 이야기를 하면서 잠깐 나왔는데요. 사실 네트워크란 것은 공평하게 모두가 연결된 시스템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이들은 노드로 한두개의 연결고리만 가지고 있으며, 중심이 되는 몇몇이 전체 네트워크를 지배하는 허브로 등장하게 됩니다. 인물평을 하기도 하고 인물평을 받기도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전체 네트워크를 지배하는 수준에 이릅니다. 제갈량과 순욱이 대표적이며 강동의 이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공융도 그런 인물 중 하나였죠. 이들이 바로 명사名士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그 인물이 아니라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전체 네트워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조와 순욱의 만남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순욱이 조조의 편에 섬으로써 연예주 지역 호족의 젊은 인사들 상당수가 그들의 편에 서게 됩니다. 또한 명사였던 순욱이 조조를 인정함으로써, 조조는 명실상부한 청류파의 일원이 되고 나아가 그 청류파를 이끌 인물로 부각된 것이죠. 원소와 저수의 만남,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 손책과 강동 이장의 만남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얻은 것은 단 한명의 뛰어난 장수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의 흡수였으며, 네트워크의 흡수는 그 호족 세력들 내부의 인재들과 함께 그들의 사병을 기반으로 하는 힘까지의 흡수라 봐야 할 것입니다.

 

 

왜 그토록 유비는 제갈량에 목매달아야 했을까요. 유비는 비록 서주에서 한번 그럴 기회가 있었지만, 청서 지방 최고의 호족이었던 공융은 하나의 군웅으로서 할거하고 있었고 서주의 인적 네트워크는 생각 외로 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걸 흡수할 만한 시간도 상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형주에서 그는 제갈량을 등용함으로써 전체 네트워크를 흡수하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얻은 것은 단 하나의 인재가 아니라 형주 지방에서의 수많은 인재로 통하는 길이었으며, 형주 지방의 호족 네트워크와 자신이 결부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전까지 한의 재흥이라는 기치와 명분만이 존재했던 유랑군 유비 세력이, 하나의 굳건한 세력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호족은 국가 세력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호족이 양날의 칼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호족과 군주와의 대립 과정에서 나타난 많은 사건들을 한번 다뤄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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