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삼국지에 관한 공부글을 찾아 올립니다.

3년전에 이런 대학논문 수준의 글을 쓰신분에게 감사할 따름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생각 외로 호응이 좋아서 당황하고 있는 라시엘입니다. 그러고보니 이 글들 이전에 삼국지와 관련된 토론 글 써본 게 다음 카페에서 군대 간다고 하기 전이었으니 벌써 6년 가까이 흘렀네요. 뭔가 제 글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 닉네임이 하나같이 익숙치 않은 걸 보면 예전 제가 상대했던 분들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어쨌든 군대 갔다오니 심지어 백미도 문을 닫았던 걸 보고 은근 충격을 받았었는데, 여전히 삼국지 쪽에는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구나, 구세대가 좀 빠져나가도 여전히 새로운 물이 들어오는구나 해서 기분이 좋습니다.

 

여하튼 잡설은 이만 하고, 글을 계속 가보죠. 오늘 파트가 사실 가장 재미있는 파트이고, 지난번 글 반응도 그랬지만 이번 글은 생각 외로 많은 분들이 이미 짐작하고 계셨던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바로 군주와 호족 세력 간의 대립 구도입니다.

 

 

3. 태양은 오직 하나여야만 한다.

 

글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에 앞서 한 가지 엉뚱한 질문, 바로 밑에 다른 분이 하셨던 질문을 한번 이어볼까 합니다.

 

여러분은 원소가 천하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저는 어린 시절 삼국지를 접하면서, 원소란 인물의 맛을 잘 몰랐습니다. 솔직히 연의든 정사든 원소에 대한 평가는 썩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조조, 유비, 손견 등에 비교하면 그 위세 등에 비해 임펙트도 약한 편입니다. 항상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인물로서 묘사가 되고, 대체 왜 이 인물이 관도대전 이전까지 하북의 최강자가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예. 저 또한 예전에는 원소는 천하인이 아니었다, 원소는 그저 별볼일 없이 가문만 믿고 설쳤던 인물 중 하나에 불과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계속 공부하면서, 특히 호족과 황제권의 대립이란 부분을 공부하면서 약간 다른 식의 의문이 점점 솟아올라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실 원소는 우유부단하던 인물이 아니라, 너무 빨리 과감했기에 패배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는,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지금의 저는 그것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호족 세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강조하여 더 말씀드릴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중요한 집단들 대부분은 단순히 호족 집단으로 구성되는 집단들은 아니었습니다. 호족 집단과 대립하는 하나의 또다른 세력, 호족 사대부로서의 이익보다는 군주를 중심으로 뭉치는 하나의 세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협 집단, 또다른 말로는 군주의 친위세력들입니다. 조조 세력의 하후씨와 조씨 세력들, 악진, 전위 등의 무장 세력들이 그들이고 유비 세력의 관우, 장비, 조운 등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이 세력들과 호족 세력들 간의 관계가, 이 시기 어쩌면 모든 사건들의 가장 큰 주범이 아닐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문열 삼국지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그 책에서 은근히 공감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제갈량과 관우 사이의 알력 다툼입니다. 이 부분은 이번에 중국에서 나온 드라마 신삼국에서도 방식은 다르지만 어느 정도 그럴 만한 소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형주를 그것 때문에 내주고 관우를 죽여야만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권력 다툼과는 별개로 형주는 당시 촉의 입장에서 잃어서는 안 되는 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권력 투쟁은 분명히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실제로 관우란 인물은 호승심이 강하고 능력이 뛰어났으며 당시 유비 집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으며, 유비 휘하의 제 2인자의 위치가 제갈량인가 관우인가는 상당히 문제되는 요소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묻겠습니다. 과연 이 둘이 대립했다면 그것은 단순히 둘 간의 권력 투쟁이었을까요?

 

제 생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마치 메리처럼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비 집단은 사실 관우, 장비를 주축으로 하는 친위 유협 집단의 양상이 강했습니다. 이들이 이후 서주 지역을 잠시 점거하면서 서주 호족 집단을 흡수하기는 하지만,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 시기도 짧았을 뿐더러 이미 조조의 공격 때 서주 호족 집단의 정체성이 상당 부분 붕괴되어 그 영향력이 미비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서주 출신이었던 이장이 강동의 이장으로 불리고, 제갈씨 집단은 엉뚱하게 형주로 가있었던 것은 그런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게다가 그나마 유비를 따랐던 호족 집단도 순식간에 자신들의 위치를 잃고 쫓겨다니는 유랑군 신세로 전락하면서 본거지와 거리를 두게 됩니다. 어쨌든 그 덕에 서주 호족 집단이었던 미축, 손건 등은 사실상 호족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유협 집단으로 편승해버리는 결과로 변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제갈량이 들어오면서 이 상황은 확실히 반전됩니다. 제갈량은 본래 형주 출신은 아니었으나 이 시기엔 이미 형주 호족들과의 접점을 가지고 있었고, 유비 정권 수립 과정에서 이후 형주는 뺏기지만 적어도 상당 기간 형주를 지배하는 구도를 취합니다. 서주 호족 때와는 다른 구도죠. 이것은 곧 이 시기를 기점으로 유비 세력이 두 개의 분파로 나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형주 호족 집단과 유협 집단이죠. 그 양측의 수장이 제갈량과 관우였습니다.

 

한편 이는 조조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욱이 들어오기 이전까지의 조조 집단 역시 철저히 유협 집단의 성격을 지닙니다. 비록 유비보다 먼저 자리를 잡았다지만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등은 호족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조조 친위대로서의 성격이 훨씬 강했습니다. 물론 이들과 순욱 등의 호족 집단 간의 대립은 유비 군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있는 것과는 달리, 거의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조의 라이벌이었던 원소 군에서는 상당히 뚜렷하게 나타나지요. 곽도, 봉기 등의 친위 세력과 전풍, 저수 등의 기주 호족 세력 간의 대립의 형태로 말입니다.

 

집단이 두 개더라도 군주의 강한 통솔력으로 하나가 되어 이끌어나갈 수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군주가 아무리 강한 통솔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대립 구도는 언제고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특히 그 문제는 평화기에 심화됩니다. 심리학이나 정치학에서 자주들 얘기하죠. 뭔가 국론 등을 통합시켜야 할 때, 단체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을 설정하면 됩니다. 확실한 적이 있을 땐 쉽게 힘을 모을 수 있습니다. 당장 그 적을 제거해야만 모두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강한 이익 명분이 서니까요. 그러나 평화기가 되면 사정은 다릅니다. 이미 외부의 적이 없어진 상태에서 서로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는 내부에서의 제로섬 게임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군주는 결국 그 중 한 쪽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군주라고 생각했을 때, 이 둘 중 어느 쪽에 힘이 실리는 것이 좋을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친위 세력과 어쨌든 자신들의 권익을 더 중시하는 호족 세력 중에서요. 답은 분명하게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허나 문제는, 이러한 호족 세력들의 힘을 얻지 못하면 국가의 명맥이 위험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어쨌건 전체의 민심과 판도를 잡고 있는 것은 친위 세력보다는 호족 세력입니다. 그들의 인적 네트워크는 물론 민들마저 그들 휘하의 사민화, 사병화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두 세력을 다루는 것은 당시 군주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군주는 최대한 호족 세력의 눈에 거슬리지는 않으면서, 동시에 그 과정에서 친위 세력의 힘을 키우는 방식으로 점차 호족 세력을 억압해나가는 형식의 전개를 해야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특히나 힘이 완벽하지 않을수록, 군주는 어떻게든 호족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됩니다.

 

이러한 관계는 이전에 제가 실컷 떠들었던 황제 중심의 환관 세력과 외척 중심의 사대부 세력 간의 대립과 동일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이 시기는 난세입니다. 그렇기에 문제는 더 복잡해지는 것이죠. 하지만 이 복잡한 양상들을 잘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이제까지 삼국 시대를 보면서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속속들이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한번, 당시 대표적인 군주들의 실패 양상들을 하나씩 살펴볼까요.

 

 

A. 그 원소의 사정

 

원소군은 결국 내분으로 붕괴했다지만 그 근본엔 역시 호족과 친위 세력 간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원소가 전풍, 저수를 배제하고 곽도, 봉기를 지원한 것은 전형적인 유협 집단 힘실어주기 정책의 일환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왜 그랬느냐 가 아닙니다. 우리는 전풍, 저수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인지하고 곽도, 봉기 등을 보잘것 없는 이들로 인지합니다. 심지어 최훈 씨의 삼국전투기에서 곽도는 살리에르가 되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과는 별개로, 중요한 것은 왜가 아닙니다. 왜는 너무 분명하게 대립 구도에서의 힘실어주기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언제"라는 것입니다.

 

시기적으로 원소는 관도대전이 치러지기도 전부터 이러한 일들을 진행합니다. 왜? 간단합니다. 이미 정국이 기울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원소는 이미 조조를 압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기에 진행했습니다만, 하지만 그럼에도 급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완전히 판도가 굳어진 상태라고 보기엔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원소의 전풍, 저수 숙청 과정은 조조의 순욱, 공융, 최염 등에 대한 숙청 과정과 그다지 차이가 없습니다. 문제는 시기였죠.

 

조조의 숙청 또한 똑같았지만 조조 군은 딱히 큰 내분 없이 상당히 조용히 이뤄집니다. 다 숙청당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호족들은 조조에 대한 지지를 보냅니다. 왜일까요? 이미 판도가 조조에게로 넘어가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조가 하북을 모두 제패한 상태에서 조조를 거스른다는 것은 유비, 손권을 지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은 지역적인 거리 문제로,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야만 가능합니다. 또한 조조 자신이 협천자의 위치에 있었던 만큼, 조조에 대한 배신은 유가적 덕성에서 벗어나는 행위였습니다. 이미 유가를 자신들의 이념으로 받아들인 호족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이는 쉽게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오히려 조조 자체에 대한 지지까지도 등장하게 됩니다. 조조는 유가적 덕정을 거부하고 법가적인 맹정을 지향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는 호족 사대부들에게는 이념적 대립 구도였습니다만, 이 시기에는 판도가 희한하게 변합니다. 계속된 혼란의 지속은 유가인들 사이에서 법가적 방식의 차용을 검토하도록 만들었고, 특히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 집단 내부에서도 자신들이 그래야만 하는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시기 이후로 법조문들에 대한 유학자들의 주석이 유행하는 양상이 일어나는데, 이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소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일단 가장 간단한 대답은, 원소 자신의 문제입니다. 원소 자신이 이러한 체제 변환을 지나치게 빨리 진행하려 했던 것일 가능성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원소 자신의 판단 착오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관점을 살짝 바꿔보면 이미지 구축의 문제로도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어째 글이 점점 심리학 쪽으로 흘러가는 건 기분 탓입니다.

 

원소의 이미지를 우리는 우유부단 등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정작 당시 시대에서의 원소의 이미지는 청류파의 우두머리로서의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정말 그래서가 아니라 원소가 그 이전부터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만들어낸 이미지입니다. 이 이미지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 덕에 하북의 패자 위치까지 올라간 원소입니다. 그렇기에 원소는 협천자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유우를 황제로 세우는 안을 내세우고 동탁이 세운 황제인 헌제를 거부하는 등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이 청류적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그 이미지를 배반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전풍의 기습 공격안을 거부한 것은 정말 아들이 아파서일까요. 그 또한 그러한 이미지의 고수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유비가 백성들 끌고 다닌 거랑 맥락이 같습니다.

 

이 시기 호족들의 숙청 과정에서도 이 이미지가 어느 정도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호족 세력은 청류파 내의 존재들이니 당연히 아군으로 봐야 합니다만, 그 자신이 분열된 상태를 놔둘 수 없다는 부분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이 청류파의 우두머리고 그 리더십을 확실히 보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열 상태 자체가 문제고 그렇기에 그것을 청산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미지 형성에 해가 되고 나아가 그 문제는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 국가 전반에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풍, 저수를 지지하고 곽도, 봉기를 쳐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친위 세력을 쳐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권력 약화와 이어지기 때문이죠. 게다가 곽도, 봉기의 안 자체가 그렇게 나쁜 안도 아니었구요.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패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사실 전국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조조 군의 이들이 패할 것이 아니라 패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수준을 확신인 양 내세운 정도가 다였죠. 그렇기에 원소의 행동은 단순히 잘못된 것으로만 보기엔 어렵습니다.

 

 

오히려 더 문제는 후계자 문제인데요. 여기서 원소군의 더 큰 문제가 드러나게 되는데, 실질적인 친위 세력의 부재 상태입니다. 곽도, 봉기 등에 대해 위에서 친위 세력으로 이야기했습니다만, 실제로 이 속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들 또한 친위 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약간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풍, 저수 등 한복 휘하에 있던 기주 호족보담야 더 친위 세력에 가깝습니다만, 이들 또한 영천 지역의 호족 세력임에는 변함없었습니다. 사실 원소 군은 그 특성상 친위 세력이 형성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원소 자신이 설정한 이미지상이 청류파의 우두머리라는 것이었고, 그것은 호족 세력의 우두머리인 만큼 근본적인 부분에서 그의 세력은 모두 호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초기부터 원소를 지지했던 세력이라면 유훈, 장도, 순우경 등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들은 오히려 세력 구조상 원소의 휘하가 아니라 원소의 동맹군적 성향이 많았고, 결국 숙청의 대상이 됩니다. 봉기, 허유는 친위 세력으로 볼 수는 있지만 허유는 세력 구도에서 외면당했고, 봉기는 영천 파에 흡수되어버립니다. 결국 실질적인 친위 세력이 소멸, 또는 아예 없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이 부분이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원담과 원상 휘하의 장수들인데요. 만약 정말로 원소가 원상을 지지했었고 친위 세력들이 원소를 제대로 따랐다면, 곽도, 신평 등 영천 호족의 중심들이 원담의 휘하로 가는 기현상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원소가 원상을 지지하지 않았든가 영천 호족들이 원소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든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원상에 대한 지지는 일단 정사가 왜곡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습니다. 청주 자사의 건은 그럴 수도 있다지만 형의 후사로 장자를 보냈다는 것에서 원담에 대한 지지가 약했던 것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겠죠.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저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전체의 체제를 보자는 것이고 그 체제에 맞게 사람들이 행동했을 거라는 전제에서 나가는 글입니다. 원소에 대해 이러한 분석을 한 글은 아직 본 적이 없으니 이건 순전히 제 의견의 연속일 뿐입니다만, 적어도 그 기본 전제에서 전개되는 것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바에서의 최선을 다한다는 전제입니다. 원소가 그저 바보였고 우유부단했다, 이런 것은 그의 능력의 문제일 뿐이고 그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그저 쉽게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더 깊은 원소의 내면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답, 오캄의 면도날 이론처럼 명쾌하게 떨어지는 답 하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내린 답을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모든 행위는 원소가 두 호족 세력을 모두 누르고 원소 자신을 중심으로 한 확고한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방식에서 나온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원소에게 있어 기주 호족 세력은 분명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었지만, 그렇다고 영천 세력 또한 자신에게 완전히 소속된 친위 세력은 아니었습니다. 원소는 청류파의 이미지 상에서 이 둘을 끌고 가야하는 것은 맞았지만, 동시에 이 둘을 누르고 자신의 권력 하에 두어야 한다는 이중적 난제를 지고 가야만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선 더 위협이 되는 기주 호족 세력을 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게다가 그에 반발한 기주 호족 세력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며 거의 숙청, 완전히 그 힘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영천 호족 세력이 오히려 그 결과 강해지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가 택한 답이 바로 원상에 대한 지지입니다. (이 부분은 이후 조조 정권에서 조식에 대한 지지와 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이는 이후 글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원상 개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원담과 원상이 갈라지자마자 영천 호족들이 원담 휘하에 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영천 호족들은 원담과 더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원소는 영천 호족들을 쳐야 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미 기주 호족 세력들은 약화된 만큼 내부 통솔이 가능했지만, 영천 호족들 또한 눌러야 하는 상황이라 정말 복잡복잡한 거죠. 그 과정에서 선택된 방식이 원상에 대한 지원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심배가 원상의 편을 든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배는 본래 출신은 기주 호족이었으나 영천 호족 세력과 긴밀한 연대를 맺고 있는 중립자적 입장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심배의 성격은 원소의 중립자적 위치와 함께 그나마 가장 친위 세력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양상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런 심배가 원상을 지지하는 것을 택했다는 것은 원소의 원상 지지 및 영천 세력에 대한 압박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영천 호족에 완전히 붙어버린 것 같았던 봉기가 원상 쪽에 붙은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친위 세력에 가까운 이들은 어쨌건 원상의 편에 붙습니다.

 

이러한 구조의 최대 난점은 원소의 사망 과정에서 확고히 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만, 적어도 그의 논리 자체에서의 허점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가장 복잡한 자군의 정치 파벌 문제의 해체 및 자신으로의 복귀를 꽤나 노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것이 역사가들 사이에서 폄하의 대상이 되었을지언정, 그 자신이 정말 그렇게 폄하가 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 있네요. 하지만 어찌 됐건, 그 파벌들 간의 관계로 해석해나간다면 원소 측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글이 좀 많이 길어졌네요. 이후 부분은 글을 잘라 다음 글로 돌리겠습니다. 여전히 이쪽은 쓸게 많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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