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호족시리즈도 드디어 끝에 다가가고 있군요. 삼국지 게임을 한번 다시 잡아보고싶네요.

 

 

 

나름 선정적인 제목을 뽑는 걸 좋아하는 저다운 제목입니다만, 이번엔 좀 심한가요. 하하;;

 

지난 글에서까지 다뤘던 내용들은 실패에 대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대단하다던 군주들이 하나같이 실패했을 정도로, 호족과 군주의 관계라는 건 참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실패 사례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호족과 군주를 아군과 적군의 관계로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뭐, 어쩔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만 그나마 호족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진행했던, 물론 말년에는 결코 아닙니다만, 손권의 사례를 보자면, 그것이 꼭 어쩔 수 없는 문제인가, 이렇게 호족과 친하게 지내는 방식으로 나가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오나라 나름 잘 굴러갔잖아요. 군주가 기분나빠서 그렇지. 아, 그럼 잘 굴러간 게 아닌가.

 

어쨌든 군주로서 군림하는 것이 실패해가는 이 시점에서, 역시 시대를 앞서나가시는 조위에서 호족과 어울릴 새로운 방안을 구상합니다. 그 주인공은 조비와 조예. 앤드류 머서라는 발명가가 이런 말을 했다죠. "아무리 자기 앞을 열심히 보더라도, 자기 뒤에 있는 아이디어는 보이지 않는다"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어떤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조위는, 관점을 전환합니다. 더 이상 군림하지 않고 공존하는, 균형을 잡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지요.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시도, 조위 정권이 택했던 방식을 중심으로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마도 다음 글이 되겠습니다만 뭐 파트는 이어지는 것이니까요. 다음 글에서는 사마씨의 서진의 친호족, 봉건적 정책의 부활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 네타인가. 가려둘까요.

 

실패했어요. 하, 하, 하.... 뭐야 이거. =_=

 

그럼, 시작합니다.

 

 

5. 내 보고 어쩌라는 겐가, 자네

 

서두에서 말씀드린 듯이, 예전 후한대부터 내려오던 군림하는 군주상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일시적인 힘의 열위와 우위, 주도권 싸움에서의 성패 등은 분명 거기에서 유래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원소가 그렇게 빨리 실패하지 않았다면 조조한테 먹히지 않았겠죠. 하지만 그 정도...라고 하기엔 좀 큰가요. 어쨌든 완벽한 성공을 거둔 전략은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조조 세력은, 그 후계자가 조비로 결정되면서 전환기를 맞습니다.

 

조비는 "기존의" 다른 모든 군주들과 하나의 차별성을 지닙니다. 호족의 지지를 얻어 군주가 되었다는 것이죠. 조조, 유비, 손견, 손책, 원소 등의 창업주들도 물론 호족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들은 먼저 그들이 있고 호족 집단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친위, 유협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집단이 이미 그 기반으로 깔려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세대 군주의 1호격이었던 손권은 손책과 그 사이에 그다지 치열한 후계 논쟁이 없었기 때문에, 호족들이 굳이 지지할 필요없이 순순히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비는 다릅니다. 호족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조식과의 경쟁에서 그가 이기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고, 따라서 그의 등극은 호족들이 발흥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호족들이 추대했다고 반드시 호족들을 키울 필요는 없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전한을 멸망시켰던 왕망이었죠. 그러나 왕망의 최후는 어떠했던가요. 최소한 정권 초기에는, 호족들의 지지로 정권을 잡은 이상 호족들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때려잡을지 어떨지는 차후 문제고요. 특히나 조비는 최초 조조로부터의 위 계승은 물론, 헌제로부터 선양 절차를 받아 조위라는 황제 국가를 수립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선양이란 것이 어떤 것입니까. 후한 구신들의 반대가 거세다면 이 또한 쉽게 이뤄질 수 없었고, 호족들의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중으로 호족의 지지를 받은 셈이니 조비의 행보는 사실 정해져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비가 찌질했던 인물도 아니고, 솔직히 정책 자체로만 보면 그나마 호족들 등쌀에 가장 잘 버텨낸 것은 조비와 그 후대인 조예가 아닐까 합니다. 이 둘은 그 세부적인 정책에서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전략 자체의 목표를 동일하게 구성하는데요. 바로 균형잡기였습니다.

 

조비의 경우에야 어쩔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호족이란 세력은 쉬이 다룰 수 있는 세력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 대항하여 강력한 친위 세력을 내세우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첫째로 원소, 또는 유선의 케이스에서 미뤄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친위 세력은 어느 정도 구성해낼 수 있지만 호족들에게 왕따를 당할 공산이 있습니다. 원소는 그것을 자신의 가문이란 측면에서 어느 정도 상쇄하기는 하였습니다만, 호족들이 군주와 완전히 대립하는 구도가 되면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조조야 워낙 독고다이였고 판도상 등을 못 돌릴 걸 아니까 그렇게 했던 거고요. 유선처럼 친위 세력 구성도 못한 채 무너져내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둘째로 손권 사후 손준의 케이스에서 미뤄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친위 세력의 강화에는 성공하지만, 오히려 그 친위 세력이 역으로 황제권을 위협하는 케이스입니다. 우리는 이 케이스를 정말 중국 역사 내내 보게 됩니다. 외척과 환관의 발흥은 모두 이러한 결과로 초래된 케이스들입니다. 친위 세력의 강화는 황제권의 강화입니다만, 동시에 판도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또다른 세력을 형성하는 결과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외척, 환관의 패악은 이미 뼈저릴만치 경험했던 삼국시대의 인물들인지라, 이들의 방법은 황실 내 같은 가문의 인물들을 키우는 방식이었습니다...만, 오히려 이것은 더 위험합니다. 그들은 비록 황제 본인만큼까지는 아니더라도 혈연적 정통성까지 가질 수 있는 위치니까요.

 

호족의 문제를 실컷 떠들었다지만, 친위 세력의 발흥 또한 황제로서는 달가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떤 방식을 택할 수 있을까요. 조비, 조예가 여기서 선택한 방식은, 양쪽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손권이 죽으면서 하려고 했던 것도 이거였는데 제갈각이 너무 쉽게 무너져버린 것입니다만... 이 이유는 뒤에 설명할게요. 어쨌건 그들은 이 둘 사이에서 양측을 적절히 기용하며 줄타기를 하고, 이 두 세력 간에는 마치 미소 냉전과 같은 갈등과 공존 상태가 지속됩니다.

 

물론 둘의 방식은 약간 다르긴 합니다. 조비의 케이스는 아무래도 지지층이 지지층인지라 호족세에 약간 우위를 두는 편이었고, 조예의 케이스는 친위 세력에 약간의 우위를 두는 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예의 정치를 "근친정치"라고까지 말합니다만, 사실 조비에 비해 상대적인 것이죠. 근친만 기용한 것도 아니고. 어쨌든 이들의 정책은 이러한 양상들을 가지고 있었고, 조비와 조예 시기까지만 해도 효과적으로 운용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조예 시기에는 오히려 이를 이용해 황제권이 꽤나 강력한 우위를 점하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 우위를 점하는 정권은 이후 수 양제나 측천무후가 나오기 전까지 없었을 정도랄까요. 조예가 맨날 축성만 한다고 특기도 축성을 줄 판입니다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황제권이 강하다는 증명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뭐, 약간 딴 얘기입니다만, 조예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이후 역사의 판도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조예가 워낙 사람을 안 만나서 대체 정체를 알 수 없었다가, 유엽이 만나고 와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 "진황과 한무와 동류이지만, 자질은 그보다 미약하다" 그냥 진시황, 한무제만큼의 모습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라, 이는 조예가 그 옛날 법가, 법술적 황제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대규모 축성이라든지 하는 것도 진시황, 한무제 등이 하던 양상과 유사합니다. 실제로 그의 근친정치도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요. 조예가 오래 살았다면, 아마 조예는 호족들을 누르고 군현제 중심의 법술적 국가를 재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흠. 조조가 조예를 사랑했던 건 닮아서인지도.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가죠. 여튼 둘 다 참 잘했어요 도장 쾅쾅이란 소립니다. 그러나 이 체제엔 문제점이 있습니다. 바로 중심추, 즉 황제 자신입니다. 황제가 유능하고 정치적 술책에 능하다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적절히 조율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황제가 무능하다면?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리다면? 미소 냉전이 둘 간의 세력 균형이 이뤄졌기에 가능했다가 결국 자본력에서 공산주의권이 밀리면서 무너져내렸던 것처럼, 한쪽 세력이 강하다면 이 체제는 삽시간에 무너져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손권 이후 제갈각이 무너지고 손준이 단독 정권을 잡으며 패악을 부린 것은, 무엇보다 중심추를 잡아야 했던 손량이 너무 어렸기에 터져나온 문제였다고 봐야 합니다. 중심추가 단단하게 서 있다면 양측 모두 눈치만 보며 황제의 총애를 더 받기 위한 경쟁 관계에 있어야 하지만, 중심추가 약해지면 얄짤없이 무너져내리는 거죠. 그리고 조예의 너무 이른 사망으로, 조위 또한 손오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고야 맙니다. 바로 조상과 사마의의 대립입니다.

 

 

조예는 지금까지의 균형 원칙에 따라 보정 또한 균형 있게 양 파의 수장들을 임명합니다. 조진의 뒤를 이어 친위파의 거두로 성장한 조상과 조조 시대 때부터 호족파의 대표격이 되었던 사마의가 그들입니다. 하지만 연배, 역량, 명망 모든 부분에서 조상은 사실 사마의의 시합이 되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조예가 바보였던 걸까요. 그러나 사견입니다만, 조상은 그리 무능한 인물까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열세를 한번에 뒤집는 것에 성공하죠. 건담과 맞서싸웠던 먼치킨 사마의를 상대로 선빵을 날린 것입니다. 보정으로 임명된 순간 이미 조상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평범한 방식으로 놔두다간 결코 사마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요. 이에 초반에 승부를 내야 한다고 판단했던 조상은, 갓 등극한 황제에게 사마의의 태부 임명을 건의합니다.

 

태부, 황제의 스승이라니 말은 참 좋습니다. 직위 상으로도 삼공보다 위이니 더할 나위 없죠. 그러나 그뿐입니다. 참고로 제갈각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갈각은 대장군이자 태부였죠.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그냥 태부라 하면 이것은 황제의 자문 역할일 뿐이고, 아직 황제가 어려 보정이 수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황제의 자문이라는 건 실권은 아무것도 없는 직책임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직책 자체는 그럴 듯하니 거부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마의는 말 그대로 벙찝니다. 어린 놈이라고 얕봤다가 초반 저글링 러시도 아니고 파일론 지어서 일꾼을 다 막아버린 노릇이니 미칠 판인 거죠.

 

물론 사마의가 그렇다고 호락호락 당할 위인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그는 자타 공인 베테랑이었고, 삼국분립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군권을 완전히 박탈당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침 손오의 공격이 있었고, 그때를 기회로 다시금 실력을 발휘합니다. "난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나 조상이 견제하고 있는 것이 뻔한 마당에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결국 사마의가 선택한 것은, 사마의가 참 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죠.

 

 

한편 조상도 여기서 그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빵 덕에 어느 정도의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명망에서 사마의에 비견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상태로는 쉽게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렇다면 이걸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마의의 명망의 기원을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합니다. 사마의가 호족 사대부의 대표인 것은 집안의 문제도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죠. 바로 군사적 역량이었습니다. 그는 촉한 제갈량과의 대립 과정에서 훌륭히 수비를 해내었고, 그 과정에서 얻은 명망이 엄청났습니다. 그렇다면 조상이 선택할 것도 동일합니다. 바로 전쟁이죠.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게 사마의입니다. 내가 나간 사이 뒤를 치면 어떡하지? 의심하는데 의심을 북돋아주다가는 단칼에 목이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사마의는 와병 중으로 위장하고 버팁니다. 일단 의심 안 받는 게 상책이니까요. 일단 조상은 그 모습을 보고 안심하고 촉한 정벌을 진행합니다. 여기서 조상이 어느 정도라도 이겼으면 좋았을 건데, 촉한이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사실 이 시기 모든 전쟁에서 승부의 최대 관건은 적군과의 대치 상황이 아니라, 지형과 날씨입니다. 정사에서는 이 부분에서 관중 지역에서의 인마 및 병량 징집 과정에 따른 착취 등을 중심으로 다뤘습니다만, 사실 이러한 식의 행위는 어느 전쟁에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형적 불리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대치 상태로 갔다는 것, 그리고 이맘 때 드는 장마로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조상은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 실컷 끌고 가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으니 치욕이죠, 이쯤 되면. 그러나 조상의 권위는 내부적으로 좀 손상은 있을지 몰라도 외면적으로만 보자면 그렇게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5년 후 조상이 황제와 함께 고평릉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을 때, 그때쯤엔 이미 사마의는 안중에 없는 상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48년 이승이 사마의를 정탐했을 때는 이젠 와병을 넘어 치매 흉내를 내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안심했을 때가 바로 절호의 기회, 사마의가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이었습니다. 조상 일행이 부교를 넘자마자, 사마의는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을 장악하고 태후의 명으로 조상 형제를 반역죄로 몰아버립니다. 참고로 여기서 태후의 명이 그만큼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 협박에 의한 것이긴 합니다만, 보정 체제는 기본적으로 임조칭제의 구도와 같이 간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즉 황제가 어릴 시 황제를 대행하는 것은 분명 보정이지만, 임조칭제 때처럼 그 보정 뒤에는 또 태후가 있는 것이지요. 황제-태후-보정, 이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상을 바보라고 부르는 한 사례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환범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면입니다. 환범은 계책을 써서 빠져나온 후 조상에게로 달려가, 성으로 돌아가지 말고 수도 밖으로 나아가 군사를 모집하자는 안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조상 형제들은 계속 고민한 끝에 이걸 포기하고 성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조상 형제의 유약함, 아둔함을 이야기합니다만, 체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또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군현제의 약점, 그리고 당시 사회가 호족 사회라는 측면입니다.

 

법가적 체제인 군현제, 유가적 체제인 봉건제. 황권은 당연히 군현제 쪽이 강합니다. 근데 왜 강할까요? 중앙에 권력이 몰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당연한 소리죠. 하지만 중앙에 권력이 몰려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뭘까요. 역시 간단합니다. 힘이 중앙에 있기 때문입니다. 힘은 뭘까요. 군대입니다. 가장 강력한 군대가 중앙에 있으니, 당연히 중앙의 힘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봉건제와는 다릅니다. 봉건제는 오히려 중앙의 군대는 빈약하고 제후들의 사병이 주가 됩니다. 그러나 군현제는 강력한 중앙군을 기반으로 하며, 그 외 지역의 군대는 거의 보초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위는 군현제 국가였죠.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대체 조상은 어딜 가면 중앙군을 누를 병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중앙군이 국경까지 가서 싸우냐고 묻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중앙군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예전 보정과 장군호에 대한 글을 보셨나요. 중국의 관료들은 황제로부터 장군호와 지절을 내려받은 후 그를 통해 군대를 징집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 즉 전쟁 상황에 맞춰서 지방군이 결성되는 형식입니다. 그렇다면 조상은 군대를 모을 수 있습니다. 보정을 수행하고 있으니 장군호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조위의 황제가 그 곁에 있습니다. 그 옛날 조조와 같은 협천자의 상황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상은 지방으로 가서 군대를 모으면 됩니다. 참 간단한데 왜 그걸 못하겠다고 그냥 항복했을까요? 이상하죠? 조상이 바보라서? 하지만 부득불 조상이 바보라고 우기시더라도, 조상의 동생 조희는 조상에 대해 간언했다고도 나오는 등 그렇게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당시 사회의 문제점입니다. 지방에서 병사를 징집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물론 조상은 정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을 현실적으로 다스리고 있는 건 누구일까요. 관료제 사회라고 해서 국가가 원하는 대로 관료 사회가 딱딱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직책상으로는 사또가 위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방 장악에선, 사또가 위일까요 아니면 이방, 호방 같은 향리들이 위일까요? 지방 백성들을 병사로 징집하고자 했을 때, 그들은 황제를 따를까요, 아니면 그 지역의 유지, 즉 호족을 따를까요? 당연히 호족을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지금 조상이 싸우고 있는 상대가 누구냐는 겁니다. 예, 바로 호족의 우두머리인 사마의인 것이죠. 즉 도망가서 병력을 모아 싸우기 위해서는, 호족의 우두머리를 치기 위해 호족의 힘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앞에서 조예가 너무 일찍 죽은 게 안타깝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문제는 조예가 오래 살았다고 해도, 이후 어린 황제가 등극했을 때 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안타까울까요?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너무 일찍 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호족의 우두머리를 쳐야 하는 상황이라도, 황제의 권위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협천자의 힘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을 얻기 전에도 유비는 어떻게든 조조와 맞서 싸웠습니다. 한실재흥이란 말이 통했거든요. 그런데 이때는 다릅니다. 왜일까요? 조위는 후한만큼 오래간 정권을 잡은 집단이 아니라 신흥 정권이었고, 따라서 그 협천자와 조위재흥이란 말이 통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국경 지역의 주요한 친위 세력과 연합할 수는 없었을까요. 하지만 이 시기 촉한, 손오와의 전쟁은 어느 정도 소강 상태였고, 게다가 상대는 군대에서는 신적인 존재였던 사마의였습니다. 그들에 대한 헤게모니를 누가 장악하고 있었을지는 당연합니다. 그럼 촉한, 손오로 도망치는 안이 있겠습니다만, 그랬다가는 조위 자체를 끝장내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죠. 뭐, 만약 그렇게라도 했다면 참 재밌었을 것 같긴 합니다만, 조상의 선택은 그래도 조위를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환범의 아이디어는 그 당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책이 아니라 그나마 희망이라도 걸어볼 수 있는 안이었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그러나 그것을 선택했을 시엔 자칫하면 황제까지 위태로워질수도 있는 안이었습니다. 이미 그렇게 빠져나가는 순간 태후의 명을 빌미로 사마의는 신황제를 세웠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위의 분열이 필연이었고 그나마 이길 가능성도 희박한 싸움이었습니다. 또한 호족들의 근거지인 지방으로 빠져나갔다가 자칫하면 그 호족들에게 자신들이 밟혀버리는 상황도 가능했습니다. 즉 불확실성과 위험 요인이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조상의 선택은 적어도 조위를 아예 그 대에서 말아먹지는 않을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뭐, 역사에 if란 없습니다. 어쨌건 조상은 항복했고,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호족의 수장 사마의가 전권을 잡았습니다. 군주와 호족 간의 기나긴 투쟁 끝에, 드디어 호족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죠. 그리고 이제 역사는, 호족 왕국 진의 시대로 넘어갑니다.

 

 

 

다음 글이 드디어 마지막이 될 듯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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