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반입니다 완결까지 몆화만 남았지만요....

 

 

글 쓰다 중간에 사라져서 죄송합니다. 삼국지 11 패치 만들던 게 막바지에 달해서 그거 완성하느라 날짜를 좀 날려먹었네요. ㅎㅎ;; 근데 오늘은 난 왜 집에 틀어박혀 있긔. 엉엉. 어쨌든, 다시 시작합니다. 그 전 내용 까먹으셨으면 내용이 이어지니 기왕이면 한번 더 읽어주시고요. 허허. -_)

 

 

 

B. 그 조조의 사정

 

조조에 대해서는 참 할말이 많네요. 과연 이번 글에서 끝낼 수 있을까요. 흠.

 

조조 세력에서 호족 세력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순욱, 순유, 곽가 등등이 모두 호족 세력이죠. 그리고 그 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조조는 엄청난 성장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공, 위왕을 칭하면서 순욱, 순유 등이 제거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융, 최염 등이 제거당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조조의 성공은 이러한 숙청을 별 무리없이 성공적으로 진행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거된 이후에도, 조조 군은 여전히 최강의 군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기에 원소의 호족 제거 정책은 실패했고, 조조의 호족 제거 정책은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고, 이후 상황을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부분이 나타납니다.

 

조조는 확실히 자기 대에 효과적으로 호족들을 숙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조 군의 이 문제가 종결된 것은 아닙니다. 진군의 구품관인법을 기반으로 호족 세력들은 암암리에 칼을 갈고 있었으며, 수장 격이었던 순욱, 공융, 최염 등이 제거당했음에도 사마의를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의 기반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조조는 삼고초려(?)를 통해서 사마의를 등용했음에도 그를 중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대해 사서 등에서는 사마의와 조조의 성격적 문제로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이것은 조조가 사마의를 어떻게든 곁에는 두고 쓰지는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일종의 감시라고 해야 할까요. 사마씨 집단은 그 시기 가장 유력한 호족이었고, 그 중에서도 야심 만만했던 사마의는 어떻게든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생각해보면 구품관인법은 참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사실 구품관인법의 시작은 기존 향거리선제 시스템이 지방관의 추천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지방 정치가 붕괴된 시점에서 중앙이 추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의 관리인 중정이 추천을 대행하는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조는 이 제도를 통해서 중앙의 힘을 강화하고, 호족 체제를 붕괴시키길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결과는, 오히려 호족제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전체 호족의 차원에서 보면 어느 정도 붕괴를 시키는 것에 성공했지만, 대신 중앙에 위치한 호족들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다 보니 몇몇 유력 호족들이 전체를 지배해버리는, 귀족 사회로의 발전 양상을 보여주게 된 것이죠.

 

이러한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조식과 조비의 후계자 분쟁이었습니다. 왜 조조는 조식을 그토록 총애하고 밀어주려고 했을까요. 그냥 재주가 뛰어나서? 예, 뭐 그렇기도 하겠습니다만, 정확히는 그 재능의 종류에 문제가 있습니다. 조비의 재능 또한 조식에 비해 결코 뒤지지는 않았습니다. 건안칠자에 둘의 이름이 모두 들어가는 것은 괜한 이유가 아닙니다. 게다가 가장 후계자로서의 정당성이 있는 조앙이 죽은 시점에서, 조비는 후계자로서의 정당성까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가후가 말했던 원소, 유표의 사례를 조조가 몰랐을까요? 그 또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비가 약간 재능이 떨어진다고 해서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정당한 후계자인 조비를 밀어주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왜 조식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호족들의 두 성향 중 하나, 그들이 사대부라는 측면입니다.

 

조비의 재능은 유가적인 성향이 강했고, 조식의 재능은 문예 쪽이었죠. 사대부들, 즉 호족들의 문화 기반은? 유가입니다. 조조의 호족 억압 정책은 바로 이 부분에서 출발합니다. 조조의 구현령은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조조의 인재 정책이었던 유재시거, 오직 능력만이 추천의 기준이라는 이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현대적 관점에서 뛰어난 정책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이전에 유재시거가 공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유가입니다. 애초에 유재시거라는 말 자체가 유학에 대한 모욕이며, 이 시기 인간에 대한 관점에 대한 배역입니다. 이것은 이 시기의 능력을 보는 기준이 현대와 달랐던 점에서 기인합니다.

 

유학에서의 능력이란 재능과 함께 유가의 덕성을 갖춘 것을 요구합니다. 아니, 오히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재능은 능력이 아닙니다. 유가의 덕성을 갖춘 것이 곧 능력이었습니다. 또한 유가적 관점에서 사람들의 본本, 즉 인물의 가문 등은 곧 능력이었습니다. 이를 가격家格이라고 합니다. 서양의 합리적 사고관에 익숙한 현대의 사람들에게 이는 이해하기 힘든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 또한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집안이 승상직을 3대째 해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럴 경우 그 집안이 또 국가의 중대사를 맡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능력 본위라지만 이를 가문을 중심으로 보게 되면, 그 가문은 그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왔고 그만한 노하우의 전승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구축한 타 가문들과의 네트워크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개인의 차원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하지만 분명한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것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유가적 사회에서의 인간은 결코 동등하지 않으며, 순전히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본위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배경적 차이가 결국 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딱 보기엔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시대의 사고 방식으로 보자면 충분한 합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가에서의 인간이란 단순한 개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사회에 소속된 인간이며 그 사회적 배경이 중시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더 현대적인 관점일 수도 있습니다. 서구 데카르트 이후의 분리적 사고가 아닌 포스트모더니즘의 통합적 사고로 판단했을 때, 이는 상당한 합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조조는 이 명제에 대해 공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옳은 것일까요? 이러한 부분에 대한 판단은 잠시 접어둡시다. 그렇다면 왜 조조는 이렇게 했을까요? 체제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것은 단순히 능력 본위의 문제가 아니라 호족 사대부 세력에 대한 정면공격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예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그들의 세력을 꺾어놓으려는 속셈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하여, 기존 세력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기존의 유가가 가지고 있던 능력 패러다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유재시거를 넘어서는, 동시에 기존 세력들도 어쩔 수 없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능력 패러다임을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문학입니다.

 

현대의 인식에서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에서 문학적 재능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즉 유학자들의 기존 패러다임에서도, 문학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재능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내려주시는 것, 즉 천명이라는 것이 개입하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학에 능한 인물들은 그만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인식했고, 건안문학으로 대표되는 문학의 강화는 유학자들로서도 차마 뭐라 하기 힘든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갈 대표로, 문학적 재능이 특출났던 조식을 후계자로 내세웠던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실제로 조식은 우리가 볼 때 칠보시 정도 말고는 그렇게 인식을 못 해서 그렇지, 두보 이전까진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보유했던 인물이었습니다(두보가 나오면서 그 시성의 이름을 두보가 가져가게 됩니다). 정치적 분야에서 제대로 활약을 못했던 게 한계였지만요. 약간 다른 얘기지만, 이러한 호족 사대부들과 군주층의 능력 패러다임 대결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수당대에서 송대에 이르는 시기 과거제의 변화 구도가 대표적인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그러나 조비, 조식 간의 대립의 승자는 결국 조비였습니다. 호족 사대부층의 지지를 얻고 있던 조비와 새로운 패러다임을 대표하던 조식 간의 대립에서 조비가 이겼다는 것은, 결국 조조 또한 호족 사대부를 완전히 꺾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조비 자신이 이러한 사대부의 지지층을 통해 올라온 인물인 만큼, 조비의 정책도 친호족적 요소를 내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어나는 각 인물들의 패턴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조비를 지지하던 층은 사대부층을 대표하던 진군, 사마의 등이었고 조식을 지지하던 층은 새롭게 떠오르던 신진 재사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조조의 친위 세력이었던 무장 집단들의 지지와 함께, 가후로 대변되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타 호족층의 지지 구도였습니다. 그리고 가후가 조비의 편을 드는 순간, 더 이상 조식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오히려 국가의 분열을 조장해서 더 큰 위기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걸 판단한 조조로서는 어쩔 수 없이 조비를 택하게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원소의 반호족 정책은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여러가지 좋게 평가할 요소들을 찾아보려고 해도, 결국 그 결과는 원소군 자체를 완전히 분열시키고 국가를 멸망에 몰아넣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성공했을까요? 조조는 그보다 좀 더 교묘하게 실시했고, 그래서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조비와 조식 간의 후계자 갈등에서, 결국 그가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비였습니다. 결국 조조가 뒤엎길 원했던 기존의 패러다임이 조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눌러버렸고, 이후 중국은 이러한 호족 사대부들 중 유력한 몇몇 가문들이 중심이 되는, 문벌 귀족 사회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즉 원소의 과격한 방식은 물론 조조의 교묘한 방식도 이 흐름 자체를 뒤엎는 것은 실패했고, 결국 이 실패가 이후 사마씨 정권의 등극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조비와 조예 시기의 정책들과 이 사마씨 정권으로의 이양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추가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C. 그 유비의 사정

 

원소, 조조가 호족층과 계속 충돌했던 것에 비해, 유비의 방식은 어쩌면 더 교묘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유비의 능력이 조조에게는 차마 미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개인의 능력이 미치지 못했던 것 때문에 방식 자체는 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참으로 기묘한 구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묘한 정치 구도는 그의 아들 유선의 대, 촉한이 결국 파탄날 수밖에 없는 구도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유비 또한 실패한 셈이라고 해야 할까요. 생각해보면 이 글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이 글들은 태양은 오직 하나여야만 한다는 이상 하에 권력의 확고화를 추구했던 당시의 군주들이, 그 과정에서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모습들을 보여주는 글이라고 보셔도 무방하겠습니다.

 

우선 유비군의 구도를 살펴보죠. 원소와 조조군 이상으로, 유비군은 분열 요소를 항시 안고 있었습니다. 일단 유비군은 관우, 장비, 조운으로 대표되는 유비군의 친위 유협 세력을 중심으로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갈량, 방통, 마량 등으로 대표되는 형주 호족 세력과, 이후 익주를 병합하면서 유입되었던 법정, 오의, 황권 등의 익주 호족 세력으로 구성됩니다. 이 세 세력 안에 속하지 못한 세력으로 마초, 마대 등이 있기는 하나, 마초처럼 이후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거나 아니면 마대처럼 세력 내로 흡수되는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어쨌든 이 거대한 세 개의 세력에서, 유비는 참으로 교묘한 정치적 술수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냅니다.

 

원소의 실패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친위 세력에 기대어 호족 세력을 탄압했고, 그 과정에서 결국 붕괴에 이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의도 자체는 국내의 혼란을 깨고 군주 중심의 체제 수립에 목적을 두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어쨌건 그것은 멸망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렇다면 조조의 실패는 무엇이었을까요. 조조는 친위 세력에 기대는 전술로는 결국 붕괴를 초래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모두가 거부할 수 없는 새로운 신세력을 만들어서 그들 휘하로 기존 세력들을 흡수시키려는 전술을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술 자체가 안정기에 어느 정도 이르기 전에는 사용할 수 없었고, 안정기에 이르면 기존 세력들이 강고해져서 이것을 쉽게 뒤엎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유비는? 유비는 아예 세 세력을 공존시키는 전술로 나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도가의 무위적 정치 방향, 마치 그의 선조 유방의 전술을 보는 듯한 느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아가서, 유비는 세 세력 모두에게 자신과의 인간적 연계성을 도모하여 전체를 자신 휘하의 유협 집단으로 통합해버립니다.

 

유비와 친위 세력 간의 연계는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유비가 정말 관우, 장비와 의형제 사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실 친위 세력의 특성상 이미 인간적 연계로 맺어지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의형제였던 아니건 간에, 유비가 관우, 장비, 조운 등에 대해 엄청난 인간적 연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형주 호족의 수장이었던 제갈량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죽으면 제갈량 보고 군주를 대신하라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던 유비는, 사실 그 술책의 교묘함에서 어찌 보면 원소와 조조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그 말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유비는 조조나 원소에 비해 '민民'으로서의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고 그것을 적절히 활용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남이가"입니다. 제갈량도 그렇기에 유비의 말에서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건, 유비의 말을 충실하게 수행합니다. 익주 호족과도 마찬가지입니다. 황권이 위에 항복하면서도 유비가 자신의 가족을 죽이거나 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것, 그리고 유비 또한 그렇게 했던 것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유력 호족이었던 오의의 딸과 결혼하면서 인적 관계를 더욱 강화시킵니다.

 

유비의 방식의 요체는 간단합니다. 군주로서 군림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었던 원소, 조조는 결국 실패합니다. 군림이 목적인 한 군림자와 피군림자 간의 대립 구도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유비는 이러한 정치적 패러다임 싸움보다는 민간 사회의 사회적 연대에 더 친숙했던 인물이었고, 그것을 정치에 완벽하게 활용합니다. 촉한 전체에서, 유비는 다스리는 지배자가 아니라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형이었습니다. 아버지처럼 군림하지조차 않습니다. 형입니다. 큰형이 동생들한테 대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모두의 의견을 듣고 같이 웃고 같이 화내던 인물이 바로 유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비군 내부에서 서로간 분열 요소가 있더라도, 적어도 그들의 목적은 하나로 통일됩니다. "우리 형을 밀어주자". 유비의 통치 방식은 그런 점에서 매우 교묘합니다. 그것이 유비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방식 덕에 적어도 유비가 죽기 이전까지의 촉한은 유비에 대한 의와 협이라는 단단한 구도에서 굴러갈 수 있었습니다.

 

약간은 안타까운 부분입니다만, 이릉전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관우, 장비가 그렇게 유비란 인물에게 개인적으로 소중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도에 봤을 때, 유비는 이릉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모두에게 의와 협으로 뭉치도록 만들었던 유비 집단에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세력에 대해 공격하고 그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세력은 당연히 공격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기존까지 쌓아왔던 의와 협의 기준 자체가 붕괴할 수 있습니다. 말만 번드르르하고 행동으로 그것을 대변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죠. 유비는 항상 행동으로 보여주었었고,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이미지와 현실이라는 둘 사이의 딜레마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지를 중시할 경우엔 현실 문제가 발생하지만, 현실 문제를 중시하다가 이미지가 붕괴되면 더 큰 현실 문제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후 글을 쓰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은 이래저래 위험한 요소를 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미지를 고수해야 하는 것 때문이죠.

 

어쨌건 원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유비의 방식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한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실 중흥의 기치를 통해 조조라는 확실한 적이 상정되면서, 유비군은 더욱 단단하게 뭉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죠. 내부의 문제를 해소하기 가장 좋은 방식은 외부에 적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조조라는 확실한 적을 두고 유비는 그에 반대되는 패러다임을 강화시킵니다. 조조가 강하게 나오면 유비는 부드럽게 움직이고, 조조가 군주로서의 권위를 세울수록 유비는 친우로서의 부드러움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양면적 패러다임을 통한 헤게모니 싸움은, 유비 군의 통합성을 더욱 증대시키는 것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비 사후에 터져나옵니다. 이러한 구도는 오직 유비에게 귀속될 뿐, 그 아들인 유선에게 귀속되는 구도가 아닙니다. 유선의 능력이 정말 출중해서 이 구도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었겠죠. 그러나 유선의 능력이 아주 아둔했다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만, 그것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유선의 관점에서 봤을 때 당시 촉의 모든 세력은 아버지의 신하일 뿐 자신의 신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너무 격의 없는 형제와 같은 사이였기에, 유선의 시대가 되었을 때 유선의 위치는 군주이면서 전체의 가장 아래에 놓이는 희한한 구도로 나타납니다. 아버지와 형제인 신하들 사이에서 유선은 뭐가 될까요. 신하들의 조카가 됩니다. 이것이 유선이 안고 있었던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제갈량은 유비의 이러한 요소들 중 외부의 적을 만들고 하는 부분을 잘 이해했던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북벌 또한 그러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제갈량은 유비의 더 거대한 능력이었던, 전체를 유협집단화하고 그 모두 위에 있었던 유비의 도가적 교묘함까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이해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그것을 활용할 순 없었습니다. 일단 자신이 군주가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그것을 유선에게 전가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유선이 보여줘야 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가야 할 부분이었던 것도 있지만, 제갈량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완벽주의적 성향과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듯 싶습니다. 제갈량 자신이 지나치게 완벽함을 추구했고, 자신이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보입니다. 사마의에게 사신을 보냈을 때 제갈량이 엔간한 판결은 자신이 내린다고 했던 것이 대표적이죠. 이런 제갈량이었기 때문에 유비와 같은 방식의 리더십 구축은 제갈량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후 구도에서 제갈량은 유선의 권위를 세워주지 못하고 자신의 사후까지, 유선이 특정 인물을 계속 의지하도록 만들어버리기에 이르고 결국 이 구도는 군주와 신하의 위치까지 뒤바꾸게 만듭니다. 동윤이 유선을 꾸짖었던 것은 이것의 가장 극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부분은 사실상 유비가 자초한 것입니다. 애초에 의협 집단으로 구성되어버린 촉한에서, 이 국가의 유지는 오직 유비 개인에게 귀속됩니다. 유비라는 개인에 대한 연대로 맺어진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유선이 취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강력한 신하들 앞에서 확고한 역량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든가, 아니면 새로운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첫번째 방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유선에게 그럴 만한 자유도가 별로 없었고, 유선 자신도 그렇게 험준한 인생에 있었던 인물이 아닌 만큼 그러한 경험과 역량을 쌓을 기회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갈량이란 인물이 다 해 버리니 기회조차 나올 수 없었죠. 그렇다면 후자의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고,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황호와 진지입니다. 여기서 환관인 황호를 선택한 것은, 생각해보면 전한, 후한의 황제들이 택한 방식과 동일합니다. 황제들의 입장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어찌 됐건 자신의 수족인 환관입니다. 게다가 신하들이 전부 아버지의 신하였기에 끌어들일 수 있는 이는 없었고, 그나마 믿을 수 있던 아버지의 친위 세력이었던 관우, 장비, 조운 등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 자식들은 능력의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호족들의 세력에 막혀서인지 그다지 큰 세력으로 발돋움할 수 없었고요. 그렇기에 자신의 친위 세력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환관들을 끌어들였지만, 여전히 신하들의 세력이 워낙 컸기에 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하들의 세력이 커진 것 또한 유비가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유선이 노력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촉한 멸망 당시 장비의 아들 장소, 관우의 손자 관이 등은 유비의 친위 세력에서 기인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나마 호족 사대부들보다는 유선과 연대를 맺을 가능성이 있었던 인물들입니다. 유선이 장비의 딸 장씨와 결혼한 것도 맥락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관우, 장비의 사망 이후 유비의 친위 세력은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상실했고, 조운은 제갈량과 연합하였기에 완벽하게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일 수 있는 세력은 아니었습니다. 장소, 관이 등의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호족 중심으로 구성된 촉한 사회를 뒤엎을 정도의 역량도 아니었고, 그만한 활약을 벌일 기회도 없었습니다. 유선의 친위 세력 형성 시도도 결국 그 기회를 잡지 못했기에 그 정도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유비의 방식 자체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강대한 조위에 맞서서 촉한이 오래간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어쨌든 유비의 방식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에까지 이어지기에는 어려운 방식이었습니다. 순전히 정치적 관점에서만 볼 때,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정권을 계속 유지한 것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권위와 절대적 역량을 가진 창시자의 뒤를 잇는다는 것은 어려우며, 게다가 그 권위와 역량이 친애의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상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촉한의 시작은 유비의 방식의 성공에서 비롯되었지만, 촉한의 실패 또한 유비의 방식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하는 것이지요.

 

D. 그 손권의 사정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손권의 방식이야말로 참으로 교묘하다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손권의 상황은 어찌 보면 유선의 상황과 상당 부분 동일합니다. 손견, 손책의 방식은 생각해보면 유비의 방식과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정보, 황개, 한당, 조무와 손견의 관계가 철저히 유협집단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고, 손책과 주유의 관계 또한 유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국을 손권은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즉 조조와 유비 같은 1세대 군주로서가 아니라, 2세대 군주로서 좀 더 교묘한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는 문제가 손권의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드라마 신삼국을 보시면 엄청난 규모의 재해석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내용들을 보며 이건 아닌데, 아, 이건 참 좋다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그 중에서 정말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부분은, 손권과 주유 간에 벌어지는 알력 관계의 측면을 다루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정말 그랬는가에 대해서는 지금 시점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 부분은 상당히 그럴 듯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손책의 말은 유비의 말만큼이나 압박입니다. 유비가 유선에게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섬기라고 한 것도 사실 유선의 입장에선 참 난감한 일이죠. 그럼 난 뭐하라고? 손책은 내부의 일은 장소에게, 외부의 일은 주유에게 상의하라고 말합니다. 유선과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그럼 난 뭐하라고? 아버지가 죽어가면서, 형이 죽어가면서 그러라고 말하니 그러라고는 했다만, 이렇게 되고 보니 이게 군주와 신하 관계인지 아니면 제자와 스승 관계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적벽 이전의 판도는 아무래도 나오는 내용이 적으니 알기 힘듭니다만, 실제로 적벽대전의 과정과 주유가 죽기 직전까지의 모습은 손권이 딱히 개입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손권의 이름이 있지만 주유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죠. 군주라면 마땅히 화를 낼 만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손권은 그에 대해 대체로 그러려니 하면서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주유 이후에도 그러한 체제는 이어집니다. 노숙, 여몽, 육손에 이르기까지, 손권은 아주 무난하게 흐름을 지속시킵니다. 그들에 대한 지원은 확실하게 해주지만 딱히 간섭하지 않습니다. 사실 손권의 군사적 재능이 부족했던 것도 있다고 봅니다. 합비에서의 실패는 단순히 장료 등이 잘 막은 것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이기지 못했던 것은 손권이 그를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했던 것도 요소 중 하나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군주로서 그가 발휘한 수완은,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호족 세력이 강대했고 창업자로서의 위상조차 없었던 손권이, 동오라는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했던 것은 대단한 것이죠, 사실.

 

이러한 손권의 방식은 바로 호족 세력을 인정하고 그 세력 사이에 융합하는 전략이었습니다. 동오의 가장 큰 문제는 타 세력들이 분열 요소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동오는 양주라는 지역 하나로 뭉쳐서 분열 요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오히려 문제였습니다. 세력의 응집력이 강하기 때문에 권력 관계를 이용한다거나 하는 방식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죠. 그렇기에 손권은 자신 또한 유력 호족이었던 손씨 집안이라는 것을 이용, 그 세력들과 마치 하나인 것처럼 하여 그들의 패러다임을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 군주들 중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동오는 그러한 구도를 통해 평화를 이룩했고, 이후 동오의 평화는 남북조 시대 남조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까요. 그 이전까지 별볼 일 없었던 남조 지역의 융성 기반은 바로 이때 닦여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결국은 문제였습니다. 원소, 조조, 유비의 방식은 어쨌건 군주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손권은 더 이상 군주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구도 속으로 들어가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엄연히 군주는 맞죠. 그러나 군주가 결정하지는 않고 전체의 이익에 따라 결정될 뿐입니다. 호족 세력 속의 융합을 통해 그렇게 큰 충돌 없이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통일을 위한 대업의 성취라든가 하는 군주로서의 권위를 세우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뒤집히는 시점은 이 동네도 역시나 후계자 갈등 문제였습니다. 특히 손패를 지원했던 것이 강동 4성으로 대표되는 강동 호족층이 아니라 보즐, 전종 등의 신세력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물론 손패가 그들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손등에서 손화로 이어지는 정통 구도는 육개, 고옹 등 강동 4성의 중심 인물들의 후원을 받고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손패를 지원했고, 그래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리고 이 구도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손권이 엄청나게 환영할 만한 구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분열 요소가 거의 없었고 그렇기에 강동 호족 세력에게 고분고분한 모습만 보여야 했던 손권의 입장에서, 이것은 오히려 전환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손권이 그렇게 유도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생각했을 가능성은 분명 상존한다고 봅니다. 이에 손권은 말년에 이르면서 대규모의 숙청을 감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심지어 국가의 동량이었던 육손을 쳐내기에 이릅니다. 사실 육손은 낮은 직위부터 승상의 직까지 올라온 만큼 자수성가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부분이 있지만 엄연히 가장 유력한 호족 세력인 육씨 일가의 한 명이었고, 자수성가 이후에는 구 세력의 수장격으로 올라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육손을 쳐냈다는 것은 손권이 호족들에게 그저 고분고분하기만 했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그전까지는 했던 걸까요? 그만큼 쌓인 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노망의 결과가 아니라, 어쩌면 손권이 그 이전까지 그토록 열망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손권이 술주정이 심했던 것도, 그 이전까지 호족들에게 눌려왔던 분노를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강건한 호족 세력들을 다 쳐내기엔 역부족이었던 것도 사실이고, 새롭게 등장한 세력 또한 엄연히 호족 세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손화, 손패를 모두 쳐낸 것은 그들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끊기 위한 행위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손권이 죽으면서 전혀 기반이 없었던 손량을 후계자로 내세우고, 손준을 보정의 한 명으로 위임한 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이러한 구도 자체를 모두 끊고 손씨 중심의 군주 체제로의 전환 의지를 선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기존 호족이 더 강경한 세력인 만큼 보즐, 전종 등의 중용은 당연한 것입니다만, 그럼에도 정국은 점점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제갈각 등이 같이 임명되기에 완전히 그렇게만 볼 수 없다고 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갈각 또한 유력 호족은 아니더라도 호족 사대부의 한 명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 또한 이후 조비의 정책을 얘기하면서 다시금 다루게 되겠지만, 일종의 균형의 유지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즉 호족 사대부의 대표격인 인물과 친위 세력의 대표격인 인물을 동시에 보정으로 임명함으로써 호족 세력을 내부로 흡수하고, 동시에 친위 세력도 강화시키는 전략의 일환으로 보아야 합니다. 특히나 유력 호족이 아닌 제갈각이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는 것은, 강동 4성의 약화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부분인 동시에 약간 비약을 하자면 이후까지 내다본 안목의 결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손준이 제갈각, 주이를 친 것 또한, 그 맥락에서 적절한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어쩌면 손권이 예상한 범주 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손준, 그리고 손침이 그 과정에서 너무 커버려서 오히려 군주인 손량을 누르기에 이른다는 것이였죠.

 

 

정리해보자면, 손권의 성공과 이후의 변화 구도는 사실 손권과 호족 관계에서 결정난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초반 호족들을 거스르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손권은 그들과 융합, 철저히 수용하는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손권의 진짜 저의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필연적 선택에 가까웠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생기자, 손권 또한 원소, 조조 등과 같은 강경한 숙청 정책을 통해 손씨 중심의 국가 수립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권의 정책 또한 역시나 한계를 낳습니다. 조조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조조 사후 조비와는 달리, 손권 사후 손량 정권에서 확실히 호족 세력은 약화되었고 손씨 중심의 정권 수립이 어느 정도 이뤄졌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조비 정권은 이후 얘기하겠지만 결국 호족 정권으로 이양되었죠. 손권이 손준에게 보정을 맡긴 것은 사실 그들이 손량을 위협하기 전까지만 해도 성공적으로 수행됩니다. 제갈각, 주이 등의 호족 잔존 세력을 모두 꺾었고, 손침 대에 이르면 연합이었던 전씨 가문까지 몰아내며 손씨 독재 체제를 강고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반면, 호족 정권으로 이양되지 않고 독재적 군주 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불안 요소가 상존하게 됩니다. 호족들이 손씨 집안에 충성하는 그 수위가 떨어진다는 문제도 있거니와, 그 과정에서 손씨를 위협하는 또다른 손씨가 나올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측면입니다. 손량과 손준의 관계는 손량에 충성하는 친위 세력의 성격이 아니라 더 깊게 살펴보면 오히려 경쟁자적 구도로의 발전 가능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최종적으로 동오 정권이 붕괴했던 것도 이 혼란 구조를 재편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들어 결국 호족 세력의 힘을 다시금 빌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결국 사마씨 정권에게 잡아먹히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정리입니다. 원소, 조조, 유비, 손권 모두 뛰어난 군주였고 그들은 끊임없이 호족과 군주의 관계에서 더 좋은 포지션을 장악하기 위한 노력을 벌여왔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방식은 일시적 성공은 거두었을지언정, 결과적으로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흐름의 문제였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미 호족들에게로 세력의 판도는 넘어간 상태였고, 이들 군주들은 이러한 상황을 뒤집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닐까요. 결국 이들이 그토록 노력해서 만들었던 국가들은 호족들의 수장이자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던 사마씨에 의해 통일되고야 맙니다.

 

태양은 오직 하나여야만 한다. 진시황 이후 지속적으로 내려오는 패러다임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군주들은 당연히 그렇게 하길 원했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경쟁 세력이었던 호족들을 눌러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오직 하나여야만 하는 시대는, 점점 종말을 맞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어떤 선택을 했다면 그러한 패러다임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그토록 싸워야 했는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조조의 피어린 숙청을 보고 잔인하다고 말하며, 유표와 원소의 예시를 얘기하며 조조가 조식을 선택하고자 한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유선을 보며 아둔하다고 개탄하고, 손권을 보며 노망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체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그들은 이러한 상황들을 해결해나가고자 누구보다 노력했던 이들은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단지 그것이 실패로 끝났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역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잘했느냐 잘못했느냐가 아니라, 왜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상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많이 늦었어요. 죄송죄송 ㅠㅠ

 

다음 글에서는 조위 정권을 중심으로, 군주 중심의 정책이 모두 실패한 시점에서 그 사이를 줄타기하던 이들의 이야기를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글에서 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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