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시엘님의 호족시리즈 마지막입니다.

모두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지식을 알려주신 라시엘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마지막 글입니다. 오랜만에 전체를 쭈루룩 읽어보는데, 참 길게도 썼네 싶네요. 저야 그냥 쓴다지만 어떻게 다들 읽으시는지. 하하하하;;; 어쨌든, 마지막은 다시 시작으로 돌아갑니다. 이 시리즈의 첫 시작을 유가와 법가의 충돌이란 관점에서 호족-황제 체제의 충돌 과정으로 시작했었죠. 기억나세요? 안 나시겠지만 그랬었어요. 하지만 이건 호족의 사상적 기반, 정치적 현상이 일어나게 된 현상들을 설명하면서 썼던 것인 만큼 조금은 단편적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번 마지막 글은, 이 당시 유학에 아예 초점을 집중하여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진시황의 시절이 끝나고 호족, 황제들의 대립 시대가 도래하면서, 가장 중시되었던 사상은 유학이었습니다. 황제는 법가의 실패에 따라 법가를 더 이상 내세울 수는 없었지만 자신들을 포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가를 이용했고, 호족들 또한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유가를 이용하였습니다. 물론 둘의 의도가 명백히 다른 동상이몽의 시대였지만, 이러나저러나 둘다 유가를 가지고 떠들떠들했으니 유학의 부흥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왜 이토록 유학을 떠들어댔느냐. 법가야 명분을 잃었다지만 한고조 유방이 초기에 들고 나왔던 도가도 있고 묵가도 있고 종횡가도 있고 병가도 있고 제자백가가 괜한 소리가 아니듯 다들 말만 죽어라 떠들어대서 이 소리도 있고 저 소리도 있는데 왜 하필 유가였느냐.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지배 질서가 확실한 사상이기 때문이죠. 법가의 지배 질서는 실패로 돌아가서 더 이상 얘기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묵가 스타일은 지배층에게 내키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의 도가는 그래도 수용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죠. 국가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도가는 확고한 정치 철학이 없는 학파였던 만큼 점차 소강 상태로 접어들고, 가장 지배층의 입맛에 맞는 유가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체계적인 통치 기술의 제공입니다. 유학의 논리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군사부일체로 압축됩니다. 황제는 곧 아비요, 백성은 곧 아들이니 가정에서 아비를 자식이 섬기고 아비가 집을 다스리는 것처럼 다스려라. 이게 유가의 정수의 정수의 정수만 빼서 군더더기 다 털어버리고 나오는 얘기입니다. 소위 온정적 가부장제라고도 불리는 부분인데요. 이처럼 유가는 군민의 관계를 정합적으로 설명, 정당성과 정통성의 근거를 마련해주는 좋~은 학문이었습니다. 당연히 황제의 구미에는 맞을 수밖에 없겠죠? 근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사대부입니다.

 

본래 황제라는 체제가 발생한 것은 법가 사상에서였습니다. 법가 사상에서의 황제의 위치는 이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천하를 차지하고도 자기 뜻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천하를 질곡으로 삼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말해서 본래의 황제는 말 그대로 마이페이스, 지맘대로 지꼴리는대로 하는 것이 곧 황제였습니다. 법가는 군주의 독점적 지위와 권력 행사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법가 질서 하에서의 황제는 자신의 지위와 위엄에 의해 천하를 다스리는 자였습니다. '법'가라고 해서 현대 성문법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법가에서의 법은 곧 판례법이요, 판례란 곧 황제가 말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유가에서의 황제는 어떨까요. 유가에서의 황제는 곧 "존현의 체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질고 학덕이 높은 이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의 지배를 인정하는 구조입니다. 근데 안 어진 사람이 황제랍시고 나서면? 역성혁명이 괜히 있겠습니까.

 

즉 유가는 황제의 절대적 존재를 부정합니다. 법가가 안 되니 울며 겨자먹기로 쓰긴 써야겠는데, 처음부터 삐그덩 노선 타는 거죠.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앞에서 살짝 언급했던 사대부의 문제입니다. 유가의 질서는 군-민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군과 민 사이 신, 즉 사대부라는 새로운 계급층을 상정합니다. 여기서의 사대부는 황제와 인민을 매개하며 그 중간 단계에 있는 또 하나의 통치자를 가리킵니다. 유학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란 황제-사대부-인민의 3개 계급이 군주를 정점으로 모든 이들이 사회적으로 할당된 자신의 직분에 소속되어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를 말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통치자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아니, 이 문제는 그 이상입니다. 유가 질서에서의 황제는 우주적 원리, 현명하고 어진 이로서의 체현자이며, 실질적인 국가의 치자 역은 사대부가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황제와 사대부는 긴긴 시간 동안 싸워왔고, 그래서 전 그 내용을 같이 공유하고자 긴긴 글을 써왔습니다. 그리고 그 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을 계속 괴롭혀왔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좀 더 재미있는 현상이 시작됩니다. 바로 기존 유학에 대한 거부 현상입니다.

 

사실 유학이 사회의 실질적 이데올로기를 장악한 것은 이미 후한 광무제의 등극 이후입니다. 황제는 계속해서 그것을 방어해보려고 하고 그 과정이 후한을 거쳐 삼국 시대 내내 관통하는 과정이었습니다만, 이것은 권력 투쟁 과정에서의 산물이며 그 이전에 사회적 이데올로기는 이미 유학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제 개인적인 생각에 따른 것입니다만, 사회 이데올로기의 성향은 상부 -> 하부 -> 상부 조직의 순서로 전파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이데올로기적 시스템은 분명 상부 조직, 정치 권력층이나 엘리트층에서 발생합니다. 현대적 민주주의로 나가기 위한 길을 제시했던 로크, 루소 등의 인물도 상부 조직에 소속되어 있던 이들이었고, 가장 하부 조직인 프롤레타리아층에 주목했던 공산주의조차 그 발안의 시작은 지식인층이었던 칼 마르크스였습니다. 최초의 발생은 지식인, 정치인 등이 주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부 조직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하부 조직의 일원들에 의해 이데올로기는 변형, 제창조됩니다. 그리고 최초 상부 조직층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이데올로기는 다시금 상부 조직의 보수적 세력을 위협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투쟁이 일어나고 그 투쟁에서 승리한 이데올로기는 전체 시스템을 장악하게 된다는 것이죠.

 

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황제 정권에서 동중서, 육가 등의 의견을 받아들이며 유학을 채택하기 시작했던 것이 유학 이데올로기의 시작이었다면, 이것이 하부 조직으로 전파되면서 전체 사회를 바꾸고, 그것이 다시금 상부 조직을 위협하는 상황이 후한대와 삼국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즉 전한대의 구조는 이 중 상부 조직에서 하부 조직으로의 전파 과정이었다면, 후한대와 삼국시대는 하부 조직의 상부 조직에 대한 투쟁 과정이며, 서진 이후의 정권은 상부 조직까지 장악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상부 조직에서의 투쟁 과정에서 유가와 기존 황제 정권의 충돌이 있다는 것은, 동시에 하부 조직에서는 이미 유학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있다는 것은 동시에 그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발이 생길 것이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이미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기 시작한 유가가 상부 보수 조직과 싸우고 있는 사이, 유가 내에서는 동시에 기존 유학에 대한 반발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특히 기존 유학의 형태가 이러한 판도를 나타나게 한 이유로 지적됩니다. 기존 유학은 기본적으로 잔구학이라 하여 구절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경학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존의 유학은 그 당시 지식인들이 집중했던 두 가지 측면 중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개혁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완전한 실무 중심,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의 요구에 대해서는 보수적이고 경직되어 있는 경학 중심의 유학이 의미를 가질 수 없었고, 일류 사대부를 중심으로 하여 좀 더 고상한, 세상의 원리 등을 파악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요구에 대해서도 역시 기존 어구에만 집중하는 형태가 의미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한말삼초를 기점으로 이에 대한 반발과 새로운 학문에 대한 추구 경향이 일어났고, 그 반발의 유형은 저 두가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법가, 맹정으로의 회귀입니다. 즉 혼란스러운 정국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유학으로는 불가능하고, 이미 그것을 종식시켰던 예시를 보여주는 법가적 방식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가, 법술적 방식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조조였으며, 그러한 방식에 수많은 이들이 동조했던 것도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풍조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 방식을 필요로 하다 생각했고 그렇기에 조조에게 동조했던 상당수의 이들이, 여전히 대부분의 경우 유학자라는 신분은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조는 정말 이례적인 인물이었고, 그 외의 인물들 중 상당수는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 즉 법가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관점과 신분적으로, 또는 기존의 교육 속에서 유가의 방식으로 교육받아왔던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모습들을 보입니다. 순욱, 최염 등이 그러했고 정말 법술적 성향이 매우 강했던 유엽조차 그 혈통적 문제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갈량 또한 이러한 경우의 하나였다고 봅니다. 이것이 삼국 시대 전체를 통틀어 일어나는 숱한 정치적 현상들을 만들어낸 이유였습니다. 사족으로 한마디 더하자면 곽가가 조조와 그토록 잘 맞았던 것은 곽가가 기존 유가적 입장에서 가장 탈피해 있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네요. 곽가가 살아있었다면 그를 중심으로 법가적 성향의 파벌을 형성할 수 있었을 테고, 호족 세력들과 대립하고 있었던 조조의 가장 강한 원군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조조의 개혁이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곽가의 죽음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근데 오늘 할 얘기의 중심은 이쪽은 아니고요.

 

두번째로 현학입니다. 주인공 등장하는 건 원래 초반이어야 하는데요. 베스트셀러는 글러먹었네요.

 

현학적이라는 말을 한번쯤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쓸데없이 어렵게 말한다, 뭐 이런 뜻이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결코 좋은 의미의 말로 나오는 말은 아닙니다. 실제 이 시기의 현학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론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학의 전통이란 측면에서 봤을 때, 그리고 동아시아 사상사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현학은 정말 매우 엄청나게 지독히도 중요한 사상적 흐름이었습니다. 부사 참 많네요.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에요.

 

그렇다면 현학이란 뭘까요. 현학이란 삼현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을 말합니다. 삼현이란 노자, 장자, 주역을 말하는데요. 현이 어질 현이 아니라 검을 현입니다. 왜 저렇게 부르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둠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까요. 어쨌든 저 삼현을 읽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문이 곧 삼현입니다.

 

공자가 주창한 유학이 현대사회에 오면서 현실성이 없다느니 구시대적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공격당하고 있는데요. 본래 유학은 지나칠 정도로 현실 중심, 실무 중심의 성향을 지닌 학문이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의 관점에 따라 많은 이들이 서양은 현실, 이성 중심적이고 동양은 신비적이고 감성 중심적이라고 인식하시는 경우가 많은데요. 간단하게 말하면 완전하리만치 착각입니다. 오히려 중심을 이루던 사상들을 보면 그 정반대라고 보는 쪽이 맞습니다. 서양 철학의 시작이었던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은 현실 세계의 우리들이 보기에는 말장난이나 다름없어 보이며, 소크라테스 이후의 학문들 모두가 형이상학적 요소가 매우 강합니다. 반면 동양 쪽은 유가, 법가 등 현실적으로 국가를 어떻게 통치하고 어떻게 안정시킬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학문들이 철학으로 자리잡아왔습니다. 유가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학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유가는 오히려 새로운 요구에 대해서는 부합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하죠. 시대는 바뀌고 요구는 달라지는데, 현실적인 문제를 얘기하다 보니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죠. 현실은 이미 변했으니 현실에 대한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며, 이상주의자들에게는 역시나 현실만 이야기하고 있으니 요구가 수용되지 않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이미 설명을 했고요. 두번째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시기 사회는 유학이 보편화되고 그것을 주도하는 사대부 계층이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하면서, 한편으로는 호족 사대부들의 귀족화가 진행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향거리선제와 그 뒤를 잇는 구품관인법은 전형적인 추천제 시스템입니다. 일전에 설명한 대로 호족들은 모두들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었고, 당연히 고급 호족들의 경우 추천받는 게 너무 쉬운 일이 되었습니다. 진짜 심각한 수준의 장애가 있지 않는 한 엔간해서는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것이죠. 게다가 관직에 나가지 않더라도 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만큼 먹고 사는 지장이 없습니다.

 

메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이라는 걸 혹시 아시나요? 그다지 복잡한 이론은 아니구요. 욕구에는 5단계가 있으며 하위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사람들이 상위 욕구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내용입니다. 단, 특정 욕구가 충족되어 욕구 단계가 올라가 있는 상태에서는, 하위 욕구가 다시 충족되지 않는 상태가 되더라도 상위 욕구에 대한 추구 성향이 나타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어쨌든 당시 호족들은 하위 욕구, 이를테면 식욕이나 성욕 등 원초적 욕구에서는 더 이상 걱정이 없습니다. 관직도 나가려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자연히 귀족들은 현실적인 문제가 점점 구차한 문제가 되고, 이상적인 것에 대한 욕구가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현학입니다.

 

그렇다면 현학이란? 앞에서 말한 대로 삼현을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삼현이란 앞에서 말한 대로 주역, 노자, 장자를 말합니다. 그럼 왜 이걸 공부하는 걸까요. 거기에서 현학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현학은 현실만 추구하는 유학에 대한 반발에서 나왔으니 당연히 현실이 아닌 이상에 집중합니다. 이상이란 뭔가. 현학이 추구하는 것은 본질에 대한, 하늘의 이치, 즉 천리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유학은 현실에만 집중해왔고, 당연히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다루는 경전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역만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답을 던져주고 있었죠. 그럼 대체 어디에서 이러한 내용을 공부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도가의 경전들, 즉 노자와 장자입니다. 현학은 이 세가지를 중심으로 천리와 세계에 대한 관념을 찾고자 했던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본질은 보이는 대상이 아닙니다. 경전에서 나오는 내용도 한계가 있고, 사실 현학이라는 것의 등장 또한 경전에 대한 지나친 집착, 잔구학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던 만큼 경전에 대한 의존도는 그리 높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볼 수 있는 것도 없고 경전에 대한 의존도도 낮다면, 대체 무엇을 가지고 본질을 논해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논리입니다. 이 시기 중국에는 인도로부터 불교를 포함한 다양한 학문들이 유입되는 시기였으며, 그 과정에서 논리학 또한 유입되었습니다. 현학은 바로 이 논리학에 방점을 둔, 기존 유학은 물론 향후 유학의 발전 과정에서도 약간은 이례적인 학문이었습니다. 사실 학계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중국어는 언어 자체가 한 글자로 완결성을 지니는 형태로 구성된 만큼, 조사나 접속사 등을 중점으로 전개되는 논리학은 발전하기 어려운 형태였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현학은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관점을 반박할 만한 학문이었습니다.

 

현학의 전개는 그룹 단위의 대화로 이뤄지는데, 최소 3인으로 구성됩니다. 이 대화를 청담이라고 하는데요. 그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주담 : 주제를 정해 끌고 나가는 역할

2. 객담 : 주담과 함게 논리를 같이 토론하며 반박하는 역할

3. 배담 : 토론의 총괄자이자 사회자로 토론의 결과를 사대부 사회에 알리는 역할

 

그럼 청담에서는 대체 무슨 대화를 할까요. 여기서의 주제는 바로 명리 승부입니다. 명, 즉 이름과 리, 즉 실체를 일체화시키는 것이 청담의 주된 내용입니다. 리에 대해 가장 본질을 꿰뚫는 확실한 명제를 만들기 위해 점차 세분화하여 명과 리를 일치화시키는 것이 명리 승부라는 것인데요. 이렇게 말해봐야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실 분들을 위해 개략적인 수준이지만 예시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주담 : "닭은 사람이야"

객담 : "닭에는 깃털이 있는데 사람에겐 깃털이 없잖아"

주담 : "그럼 깃털이 없는 닭은 사람인 거지"

객담 : "닭의 날개랑 사람의 팔은 그 모양이 다르잖아"

주담 : "그럼 깃털 없는 닭은 팔이 날개의 형태로 바뀐 사람인 거지"

객담 : "......." (반박 종료)

배담 : "주담 XX님이 깃털 없는 닭은 팔이 날개의 형태로 바뀐 사람이라는 명제를 완성했습니다"

사대부들 : "와와!"

 

뭐, 설마 이런 명제를 세웠겠냐마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보시면 대충 맞습니다. 근데 사실 제가 현학 쪽에 집중해서 공부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들은 바로는 저 정도 수준의 명제도 많이 만들었다고는 하더이다. 뭐 어쨌건, 이 과정에서 나타난 말이 바로 "명사"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명사란 이러한 대화를 통해 명제를 완성시킨 이, 주담 역할을 수행한 인물을 말하는데요. 이렇게 완성된 명제는 모든 사대부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형성하게 됩니다. 향후 나오는 명제들은 기존의 명제에 의지하게 되는 구조랄까요. 기존의 명제를 근거로 삼아 새로운 명제가 나오고, 그 명제를 통해 새로운 명제가 나오는 식이라는 거죠. 결국 명제를 만든 이, 즉 명사는 사대부 사회의 기준점이자 지배적 역할을 수행하는 이가 됩니다.

 

근데 대체 뭐 땜시 이 인간은 이 재미없는 이야기를 길게길게 떠들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여기서 주목할 것이 사실 주담이 아니라 배담이기 때문입니다.

 

현학의 초기에는 앞에서 설명하는 내용과 마찬가지로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기가 지날수록 이러한 분위기는 변해갑니다. 애초에 사대부들은 아무리 권력에 동떨어진 이상, 나쁘게 말하면 헛소리만 하고 있다 하더라도 지배층은 결국 그들입니다. 그들의 대화가 결국 정치와 연결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죠. 이 과정에서 청담은 진짜 명리가 아니라 명사라는 위치를 따내기 위한 설전, 궤변이 난무하는 형태로 변해갔고, 특정한 명사를 중심으로 그 주위의 배담들이 하나의 파당을 형성하는 현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새로운 풍토가 나타나는데, 바로 인물평의 강화입니다.

 

초기 현학의 움직임을 통해 몇몇 명사들이 등장하게 되는데요. 이들이 사대부의 기준을 만드는 이들로 자리잡으면서 청담에서는 인물평이 새로운 중심 포인트로 등장하게 됩니다. 명사들이 하는 인물평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예전 글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내용입니다. 조조가 왜 그토록 허소를 따라다니면서 인물평을 얻고자 했을까요. 인물평을 얻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청담을 중심으로 하는 사대부 사회 내에 편입되었다는 의미, 어떠한 명사가 인물평을 할 정도로 명망이 있고 포텐셜이 있는 인물이라는 의미 등등 다양한 의미를 동시에 가질 수 있을 수 있는 것이죠.

 

 

현학이란 당시 호족사대부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불교의 유입과 확산, 도교의 활성화 등 다양한 현상들이 모두 현학이라는 이 기이한 학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의미 또한 큽니다. 현실 중심적이었던 유학이 본질적 요소에 집중하게 된 이 흐름은 이후 송대의 성리학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형성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제외하더라도, 이것이 호족 사대부 사회의 형성과 인물들의 활동 행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합니다. 왜 순욱이 들어오면서 수많은 이들이 조조 군에 줄줄이 유입되었는지, 왜 능력도 없는 허명이라고 불렸던 허정이 그토록 높은 지위까지 올라야 했는지, 사마휘 등의 명사들이 인물 추천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방통이나 공융 등의 인물들이 인물평을 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이 바로 여기서 모두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강하팔준, 죽림칠현 등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대체 이들이 뭘 했느냐 하는 거죠. 하지만 현학이란 대상을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그것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이들은 사대부 사회의 내부 속성상에서는 그 정치적인 인물들을 좌우했던 인물들이 그들이었달까요. 단순히 현실에 아무 것도 안 한 것 같아서 그들이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전체 그림을 다시 그려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전체 그림에서는 그 무의미해보이는 이들이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호족 사회에 대한 꽤나 긴 글을 완결지으면서 제가 왜 하필 현학이란 주제로 마지막 글을 정했을까요. 바로 그러한 이유입니다.

 

 

예전 어떤 분께서 역사 공부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질문하신 것에 대해 답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야 사학과를 전공했어도 지금은 대학원 고민하다 끝내 때려치고 이제는 반쯤은 취미 삼아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입장이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맞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역사에 대해 공부하시는 분들께는 이런 관점을 가지셨으면 한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건을 보실 때 절대 그 사건 자체만 보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작은 점 하나도, 별 의미 없어보이는 것 하나도 그냥 쉽게 지나가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캄의 면도날 이론처럼, 간단한 것이 진리에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라는 것은 분명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굴러가고 있고, 수많은 변수들의 연계와 전환 속에서 사건이란 그 과정에 나타나는 하나의 파편입니다. 어떤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이 수많은 변수들을 찬찬히 읽어내실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이러하니 이러하다, 라는 간단한 결론으로 도출해내기에는 사회란 충분히 복잡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역사를 좋아하고 사학을 전공한 만큼 일반인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일단 서양사 전공자인 데다가 한문 독해 능력이 떨어지는 만큼 지식에서는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단지 제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비록 부족한 지식이지만 그것을 통해 전체 그림을 그리면서 새로운 관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역사란 것은, 그러한 것을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뭔가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정사에 이렇게 나와 있더라, 자치통감에 이렇게 나와 있더라 하면 그것은 분명한 지식이며 거기에 대해서는 논박할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지식을 왜 쌓을까요. 아는 게 좋아서? 저도 지식 오타쿠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뭐든 간에 지식이 늘어나는 것에 기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 공부의 끝이라면, 그것은 뭔가 허무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진정 역사를 공부하는 의미는, 그를 통해 전체의 그림을 그리는 법을 익혀가는 것이 아닐까요.

 

전체 그림을 그리는 것인 만큼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지식의 부족, 관점의 차이 등등에 따라 사람마다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려낼 수도 있습니다. 역사학은 그러한 모든 것을 인정하는 학문입니다. 물론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겠지만, 누구도 옳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관점과 수많은 그림들을 생각하고 나누고 그를 위해 토론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수정해가는 과정, 그를 통해 좀 더 정확히 보는 법을 익혀가는 과정이 곧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 3 때부터 삼국지 카페에서 토론장에 뒹굴거렸으니 인터넷 토론만 얼추 12년을 넘게 했네요. 그 동안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고, 싸우기도 참 오죽이도 많이 싸웟고, 감정이 올라온 경험도 꽤습니다. 저런 새끼가 왜 설치나 싶으면서 속으로 열불을 삭힌 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 각각의 사건들이 감정까지 상해가면서 싸울 문제였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토론 과정들이 지식을 익혀가는 과정이었고 새로운 관점을 배워가는 과정이었을 뿐인데요. 전체 그림을 그릴 줄 안다고는 하나 저 또한 완벽하지 못하고, 세상 어느 사람도 완벽하지 못합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완벽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당연히 완벽할 수 없습니다. 좀 더 겸허하게 남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진다면, 우리의 지식도 관점도 한층 더 성숙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잡설이 길었습니다. 드디어 시리즈 글을 완결하는군요. 새로운 글로 예전에 쓰던 인물론을 계속 써볼까 생각 중이긴 합니다만, 글쎄.... 잘은 모르겠네요. 글 7개 쓰면서 이처럼 오래 걸릴 줄야. 하하하;;

 

그 동안 읽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아직도 마지막회가 아니십니다. 하지만 다음은 진짜 마지막이에요.

 

 

격조했습니다. 갑자기 요새 일이 몰리면서 글을 제대로 쓰질 못했네요. 죄송. ㅎㅎ;; 오랜만에 쓰는 글이지만 기존 글에 이어집니다. 물론 국가가 바뀌었으니 글이 달라지긴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제 아이디 클릭하시고 게시물 보기 한번쯤 눌러주시는 편이 이해하시기엔 더 편하지 않을까 하네요. 뭐, 원하시는 분만 그러시면 되는 거고. 저야 글이나 쓰면 되는 거고. 아, 예. 음. 아, 참고로 마지막 글일 줄 알았는데, 호족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미비된 부분이 있어요. 다음 글에서 총정리 겸사겸사 다뤄보지 않을까 하네요.

 

어쨌든, 시작합니다.

 

 

 

전번 글에서 조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했었는데요. 사실 조씨 집안도 꽤나 이름 높은 집안이긴 했지만, 그 본질을 따지면 엄연히 탁류입니다. 창업자인 조조 자신도 환관 조등의 손자였죠.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욱 더 그들의 움직임이 호족 지향적, 유가 및 덕정 지향적이기보다는 군주 지향적, 법가 및 맹정 지향적이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새롭게 권력을 쥐게 된 사마씨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르고, 이것은 이후 정치 판도에서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을 야기합니다.

 

이것은 사실 성에서부터 나타나는데요. "사마"라는 말을 성씨 말고도 어디서 들어보신 기억이 있을 겁니다. 예, 바로 관직입니다. 본래 성씨라는 것은 서구에서도 그랬고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귀족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은주 시대 봉토를 받았던 봉건 제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성씨였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어찌어찌 하는 과정 중에 하나둘 성씨를 가지게 됩니다. 봉토를 받은 이들이 늘어난 것도 있지만, 그 외에도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둘 성씨를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뭐, 꽤나 복잡한 이야기니 대충 생략하겠습니다만, 이 과정에서 많이 쓰였던 것이 사는 지역, 또는 대대로 물려받은 직함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사마"라는 성씨 또한 여기서 유래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사마"입니다. 사마는 단순한 관료가 아닙니다. 막부 체제 하에 있는 막료직 중 하나죠. 예전 보정 글에서 말씀드린 적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막료직이라는 것은 결국 당시의 호족 사대부들의 근간이 되는 직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마씨는 이 직함을 대대손손 물려받다 못해 성씨로까지 쓰고 있던 이들입니다. 그 뜻은? 이들은 뿌리부터 호족 사대부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번 글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사마 씨는 당시 지역사회의 대호족을 넘어서서 조위 호족 세력의 우두머리격에 속하던 집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권력을 잡는 과정도 이러한 호족 세력들의 지지를 얻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죠.

 

어쨌든 이런 사마씨 정권이 드디어 권력을 장악했고, 사마염은 선양을 통해 조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인 "진"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정권은, 철저히 호족 지향적입니다. 그리고 이 호족 지향적이란 말은 곧 봉건적이라는 말이며, 유가적이라는 말과 통하게 되겠지요. 즉 진의 등장은 기존 진황-한무-조위로 이어지는 군현제 체제,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로부터 시작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 제민정치 구도의 실패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후로도 그러한 시도들이 한번씩 계속 나오기는 합니다만, 단지 나오기만 할 뿐입니다.

 

 

서진의 정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군국제의 선언입니다. 서진 시대에는 사실상 폐기되어 명예직에 불과했던 왕, 공의 직위가 다시금 주대나 전한 초기 수준까지 올라가며, 각 지역은 이 시기 임명된 왕들이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말이 군국제라 사람들이 자주 착각합니다만, 군국제는 봉건제랑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시스템이죠. 어쨌든 봉건 체제가 다시 돌아왔고, 각 지역에는 사마씨를 가진 황족들이 왕으로 임명되어 봉지를 지킵니다. 중앙의 황제를 중심으로 왕들이 울타리처럼 지키고 있는 형국이 되는 것이죠. 주대, 전한대 그대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나올 성도 싶습니다. 호족 정치라는데 본래의 호족 집단이 아니라 왕위를 사마씨가 다 차지하면 결국 별 차이가 없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죠. 사실 그래 보입니다만, 이것은 예전 보정 글에서 말씀드렸던 막부 체제와 관련하여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호족 사대부에게 필요한 것은 관직으로 나갈 수 있는 길입니다. 사대부는 유가에 대한 숭상을 하며, 유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입신양명하여 경국안민하는 것입니다. 즉, 관직으로 나가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치자의 입장이 되고, 황제를 돕는 보좌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황제의 절대권을 중시하는 군현제에서는 관료는 단지 황제의 수족일 뿐입니다. 그나마 황제 중심의 몇몇밖에 자리가 없죠. 하지만 봉건제는 다릅니다. 각각의 왕이 모두 관료를 뽑을 수 있으니 일단 자리가 넓어지고, 황제-왕으로 이어지는 계급제 사회가 이미 성립했으니 자신들이 관료로서 그들과 민 사이의 중간자적 계급 형성이 가능합니다.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죠. 또한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유가의 시조 공자가 모시는 인물이 곧 주공 단이요, 주공 단이 세운 체제가 바로 봉건제입니다. 봉건제의 실행은 유가 입장에서는 그것이 비록 황족들에게 왕위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모든 부분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봉건제 체제는 국가 이데올로기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지난번 글에서 나왔던 조상의 실패와도 연관성이 있습니다. 사실 조상이 협천자의 상태였음에도 대처하지 못했던 가장 큰 까닭이 황실 자체가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 외부에서 군사력을 끌어올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만약 사마씨에게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봉건제에서는 간단합니다. 주변 제후들에게 의지해서 대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런 복합적인 측면 하에, 봉건제가 부활한 것입니다.

 

 

이데올로기 측면 얘기한 김에 또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효"입니다. 유가에서 가장 중시하는 덕목은 무엇일까요? 바로 충, 효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기본 덕목으로 보기 이전에 유가의 시스템적 문제입니다. 유가는 계급제 사회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이 계급제를 유지하기 위한 덕목으로 자신보다 상위 계급에 대한 존경과 존중을 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유가의 계급제 사회는 온정적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합니다. 수신이 이뤄진 후에는 아버지로서의 제가, 아버지와 같은 군주로서의 치국, 더 나아가 평천하에 이르는 모든 구도는 아버지와 아들들, 가족제 체제에서 비롯됩니다. 이 과정에서 효가 중시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봐야겠죠. 게다가 서진은 기존 국가를 뒤엎었고, 그 과정에서 심지어 군주를 살해하기까지 했던 전력(폐제 조모 살해사건)을 가지고 있는 국가였습니다. 그렇기에 충은 내세우기가 왠지 꺼림칙한 가치였고, 이 과정에서 효가 매우 중시됩니다.

 

인간적으로 효가 중요한 것이니 중시했던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효는 충분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기의 효에 대한 강조는 철저히 국가 이데올로기적 측면으로 바라봐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무제가 효행을 중시하여 장례간 검소한 모습을 보였다지만, 낮과 밤이 다르다고 표현할 정도의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즉 무제가 정말로 효성스러워서 효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후 무제가 방탕해지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황제가 되서 폭주한 게 아니라, 그 전에 필요에 의해 숨겼다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죠.

 

어쨌건 이러한 계급제를 반영, 서진에서는 오등작제가 본격적으로 부활하기도 합니다.

 

 

자, 주절주절 떠들었지만 결국 확실한 것은, 드디어 기존 황제 절대 체제가 붕괴하고 호족 중심의 국가로 국가가 재편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게 2대가 못 가서 일이 터지고 맙니다. 왜 항상 2대 황제는 병... 음. 정치를 실패할까요. 전한대 혜제 유영이 실패한 것은 여후라는 강력한 태후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보다 윗대, 험한 난세를 거쳐온 상대였고 어머니기에 대항하기 어려운 상대라는 측면이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아내인 가남충입니다. 한혜제의 불리점도 없는데 왜? ...이번엔 굳이 말 숨길 필요 없겠습니다, 솔직히. 혜제 사마충은 정말 지적 장애가 있었으니까요. 유선 같은 농담조의 장애 수준이 아닌 진짜 장애 말입니다. 물론 추정이긴 합니다만, 신하들이 태자 교체를 논할 정도였으니 상태가 좀 심각하긴 했던 듯 싶습니다. 여튼 그 통에, 무제는 혜제가 나이는 분명 성인임에도 보정을 두는 파격적 인사를 단행합니다.

 

근데 보정을 누가 하느냐.... 일단 무제가 가장 총애하는 대신, 진 건국의 1등 공신이라 하면 삼국지 보신 분이라면 한번은 들어보셨을 가충이겠습니다. 혜제의 장인이기도 하죠. 당연히 보정도 가충이 맡는 것이 가장 맞겠습니다만, 문제는 이미 고인이 된 몸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황비 가남풍의 야심이 만만찮아, 가씨 집안의 급격한 성장도 견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결국 황제는 가씨 집안이 아닌 타 세력, 자신의 장인이었던 양준을 보정으로 임명하면서, 견제의 수를 던집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 글을 보신 분들은 어느 정도 느끼셨을 수도 있겠지만, 견제란 것은 중앙이 서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는 겁니다. 중앙에서의 조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견제는 순식간에 한쪽으로 세력이 넘어갈 수 있고, 동시에 그 과정에서 피바람이 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뭐, 안 하는 것보담야 그나마 좀 더 나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견제가 그렇게까지 효용을 가지는 방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거죠. 그리고 이번에도, 아니 이번에는 정말로 중앙, 즉 황제가 부실하기 그지 없는 상태입니다. 당연히 피바람이 일어나고야 맙니다. 바로 팔왕의 난입니다.

 

 

팔왕의 난의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야 검색해보면 대충 다 나오는 것이니 생략하겠습니다만, 중국 황제 체제에서의 황족 개념의 특수성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삼국지를 보신 분이라면 유비의 황숙황숙 드립을 워낙 보시다 보니, 황족이라는 것을 약간은 고귀하고 충정 어린 이미지로 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황족이야말로 국가 권력 최대의 위협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치는 건 역성혁명이지만 황족이 황제를 치는 건 황실 내부 갈등이며, 그 황족이 황제가 된다 해도 어느 정도의 정통성은 보유할 수 있습니다. 즉, 더 쉬운 공략이 가능합니다. 그러면서도 가족적 특성상 동족이라는, 희한한 구도가 성립됩니다.

 

이것이 중국 황제 체제에서 교묘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대홍려의 역할입니다. 대홍려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타국이나 조공국들의 외교 사절들을 접대하는, 즉 외교부의 역할을 수행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황족의 접대 또한 대홍려에서 담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엄연히 국내의 인물이고 가족인 황족입니다만, 정작 접대는 외교부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것의 유래는 주대 봉건 제후의 접대에서 유래한 것이기는 합니다. 봉건 제후 또한 황족들이었지만 동시에 완전히 소속됐다고 말하기는 힘든, 타국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황족이란 가장 친밀한 관계지만 동시에 타인이며, 국가의 중진이자 든든한 아군이지만 동시에 본국을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적군의 성격을 지닌 이중적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홍려가 여전히 황족들의 접대를 담당했다는 것은 주대부터 내려온 전통에 기인하지만, 동시에 이런 측면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팔왕의 난은 이러한 황족의 이중적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숱한 황족들이 궁성으로 진격해와 보정직을 탐하였고, 다시 또 들어오는 황족에 의해 살해당하는 과정. 사실 팔왕의 난 자체는 진이라는 통일국가의 멸망을 일으킨 직접적 사건은 아닙니다. 그저 궁중 내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졌던 정변일 뿐이죠. 그러나 이러한 내란 과정 중 각 봉건 제후들이 자신의 수하에 있던, 또는 자신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던 병력들을 끌어오게 되는데, 이것이 남흉노로 대표되는 이민족 세력들이 유입되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촉발시킨 영가의 난을 기점으로, 서진은 그 힘을 잃고 멸망의 길을 맞이합니다. 이민족 이야기는 이제 삼국지를 벗어나는 판국이 될 것 같으니 언젠가 할 기회가 있으면 하고, 이번 글에서는 생략합니다.

 

여하튼 서진 정권이 보여준 결론은 간단합니다. 호족 사회가 그토록 바랬던 봉건 제후의 부활조차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황제와 황실 내부의 봉건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밑의 호족 사회는 전혀 붕괴하지 않고 유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영가의 난을 기점으로 기존 호족 사회는 대부분 남조로의 도피 과정 등 대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시스템이 유지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후 이민족 유입 과정에서 이 시스템은 이민족 내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민족 사회가 본래 부족 사회 형태로 되어 있다 보니 적용이 더 쉬웠을 것도 있겠지만, 이민족의 한화 정책과 유학의 장려 등이 얽히면서 이민족 귀족층은 이 시대 호족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가게 됩니다. 결국 이 시스템이 관농집단이라는 토착화된 선비 귀족층을 낳았고, 그것이 결국 북위를 거쳐 수당대에 이르는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으니까요.

 

특히 보정-선양으로 이어지는 체제가 지속되면서 귀족층은 숙청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성장해왔으며, 더 이상 황제는 귀족층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과 비교하여 나을 게 없는, 이름만이 황제인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당태종이 간언을 잘 들었던 것은 그런 총명함의 문제 이전에,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결국 수당대는 더 이상 황제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황제 밑에 있는 귀족들이 지배하는 귀족사회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러한 체제는 당태종의 개혁으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당대 초중기를 계속해서 지배하는 체제로 자리잡았고, 측천무후와 당현종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문 세력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그러들게 됩니다. 더 이상 황제권이 중심이 아닌 시대, 호족 사대부라 불리는 세력이 지배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죠. 조위가 유도했던 황제 중심의 천칭 체제, 서진이 유도했던 황족 봉건과 호족의 보좌 체제 모두가 붕괴하고, 진짜 말 그대로 호족이 전국을 장악하는 시대가 되서야 혼란이 종식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황제와 호족, 즉 기득권 간의 투쟁은 사실 끊임없는 싸움이었습니다. 황제는 기득권의 지지를 필요로 했지만 동시에 그들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득권은 정당성의 문제 때문에 황제를 필요로 했지만 동시에 황제가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자신들을 누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진한대부터 수당대에 이르기까지 수백년간의 역사는 이 둘 간의 투쟁으로 점철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환관, 외척 등 수많은 세력들이 기득권의 견제 세력으로, 한편으로는 기득권에 영합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고 사라져갔던 것이 이 시대의 중국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결말은 기득권층, 호족층의 승리로 결론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능하다, 유약하다, 고집이 세다 하던 수많은 황제와 군웅들의 뒷면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민했고 실패해왔던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 인물이 무능한지, 아집에 가득차서 그랬던 건지, 그가 폭군이었는지 등등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역사적 체제를 먼저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글을 이제 앞두고 있네요. 마지막 글에서는 호족 체제의 사상 등에 대해 다뤄볼까 하는데.... 정치판이 아니라 재미가 없을려나요. ㅎㅎ; 어쨌든 정치 이야기는 이번 글로 종결입니다. 이미 서진도 멸망해버렸는데 더 나가다간 중국 역사 통째로 훑어야 되니. 지금까지 긴 글 열심히 따라와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이 호족시리즈도 드디어 끝에 다가가고 있군요. 삼국지 게임을 한번 다시 잡아보고싶네요.

 

 

 

나름 선정적인 제목을 뽑는 걸 좋아하는 저다운 제목입니다만, 이번엔 좀 심한가요. 하하;;

 

지난 글에서까지 다뤘던 내용들은 실패에 대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대단하다던 군주들이 하나같이 실패했을 정도로, 호족과 군주의 관계라는 건 참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실패 사례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호족과 군주를 아군과 적군의 관계로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뭐, 어쩔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만 그나마 호족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진행했던, 물론 말년에는 결코 아닙니다만, 손권의 사례를 보자면, 그것이 꼭 어쩔 수 없는 문제인가, 이렇게 호족과 친하게 지내는 방식으로 나가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오나라 나름 잘 굴러갔잖아요. 군주가 기분나빠서 그렇지. 아, 그럼 잘 굴러간 게 아닌가.

 

어쨌든 군주로서 군림하는 것이 실패해가는 이 시점에서, 역시 시대를 앞서나가시는 조위에서 호족과 어울릴 새로운 방안을 구상합니다. 그 주인공은 조비와 조예. 앤드류 머서라는 발명가가 이런 말을 했다죠. "아무리 자기 앞을 열심히 보더라도, 자기 뒤에 있는 아이디어는 보이지 않는다"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어떤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조위는, 관점을 전환합니다. 더 이상 군림하지 않고 공존하는, 균형을 잡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지요.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시도, 조위 정권이 택했던 방식을 중심으로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마도 다음 글이 되겠습니다만 뭐 파트는 이어지는 것이니까요. 다음 글에서는 사마씨의 서진의 친호족, 봉건적 정책의 부활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 네타인가. 가려둘까요.

 

실패했어요. 하, 하, 하.... 뭐야 이거. =_=

 

그럼, 시작합니다.

 

 

5. 내 보고 어쩌라는 겐가, 자네

 

서두에서 말씀드린 듯이, 예전 후한대부터 내려오던 군림하는 군주상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일시적인 힘의 열위와 우위, 주도권 싸움에서의 성패 등은 분명 거기에서 유래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원소가 그렇게 빨리 실패하지 않았다면 조조한테 먹히지 않았겠죠. 하지만 그 정도...라고 하기엔 좀 큰가요. 어쨌든 완벽한 성공을 거둔 전략은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조조 세력은, 그 후계자가 조비로 결정되면서 전환기를 맞습니다.

 

조비는 "기존의" 다른 모든 군주들과 하나의 차별성을 지닙니다. 호족의 지지를 얻어 군주가 되었다는 것이죠. 조조, 유비, 손견, 손책, 원소 등의 창업주들도 물론 호족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들은 먼저 그들이 있고 호족 집단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친위, 유협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집단이 이미 그 기반으로 깔려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2세대 군주의 1호격이었던 손권은 손책과 그 사이에 그다지 치열한 후계 논쟁이 없었기 때문에, 호족들이 굳이 지지할 필요없이 순순히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비는 다릅니다. 호족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조식과의 경쟁에서 그가 이기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고, 따라서 그의 등극은 호족들이 발흥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호족들이 추대했다고 반드시 호족들을 키울 필요는 없습니다. 대표적 사례가 전한을 멸망시켰던 왕망이었죠. 그러나 왕망의 최후는 어떠했던가요. 최소한 정권 초기에는, 호족들의 지지로 정권을 잡은 이상 호족들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때려잡을지 어떨지는 차후 문제고요. 특히나 조비는 최초 조조로부터의 위 계승은 물론, 헌제로부터 선양 절차를 받아 조위라는 황제 국가를 수립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선양이란 것이 어떤 것입니까. 후한 구신들의 반대가 거세다면 이 또한 쉽게 이뤄질 수 없었고, 호족들의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중으로 호족의 지지를 받은 셈이니 조비의 행보는 사실 정해져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비가 찌질했던 인물도 아니고, 솔직히 정책 자체로만 보면 그나마 호족들 등쌀에 가장 잘 버텨낸 것은 조비와 그 후대인 조예가 아닐까 합니다. 이 둘은 그 세부적인 정책에서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전략 자체의 목표를 동일하게 구성하는데요. 바로 균형잡기였습니다.

 

조비의 경우에야 어쩔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호족이란 세력은 쉬이 다룰 수 있는 세력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 대항하여 강력한 친위 세력을 내세우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첫째로 원소, 또는 유선의 케이스에서 미뤄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친위 세력은 어느 정도 구성해낼 수 있지만 호족들에게 왕따를 당할 공산이 있습니다. 원소는 그것을 자신의 가문이란 측면에서 어느 정도 상쇄하기는 하였습니다만, 호족들이 군주와 완전히 대립하는 구도가 되면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조조야 워낙 독고다이였고 판도상 등을 못 돌릴 걸 아니까 그렇게 했던 거고요. 유선처럼 친위 세력 구성도 못한 채 무너져내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둘째로 손권 사후 손준의 케이스에서 미뤄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친위 세력의 강화에는 성공하지만, 오히려 그 친위 세력이 역으로 황제권을 위협하는 케이스입니다. 우리는 이 케이스를 정말 중국 역사 내내 보게 됩니다. 외척과 환관의 발흥은 모두 이러한 결과로 초래된 케이스들입니다. 친위 세력의 강화는 황제권의 강화입니다만, 동시에 판도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또다른 세력을 형성하는 결과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외척, 환관의 패악은 이미 뼈저릴만치 경험했던 삼국시대의 인물들인지라, 이들의 방법은 황실 내 같은 가문의 인물들을 키우는 방식이었습니다...만, 오히려 이것은 더 위험합니다. 그들은 비록 황제 본인만큼까지는 아니더라도 혈연적 정통성까지 가질 수 있는 위치니까요.

 

호족의 문제를 실컷 떠들었다지만, 친위 세력의 발흥 또한 황제로서는 달가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떤 방식을 택할 수 있을까요. 조비, 조예가 여기서 선택한 방식은, 양쪽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손권이 죽으면서 하려고 했던 것도 이거였는데 제갈각이 너무 쉽게 무너져버린 것입니다만... 이 이유는 뒤에 설명할게요. 어쨌건 그들은 이 둘 사이에서 양측을 적절히 기용하며 줄타기를 하고, 이 두 세력 간에는 마치 미소 냉전과 같은 갈등과 공존 상태가 지속됩니다.

 

물론 둘의 방식은 약간 다르긴 합니다. 조비의 케이스는 아무래도 지지층이 지지층인지라 호족세에 약간 우위를 두는 편이었고, 조예의 케이스는 친위 세력에 약간의 우위를 두는 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예의 정치를 "근친정치"라고까지 말합니다만, 사실 조비에 비해 상대적인 것이죠. 근친만 기용한 것도 아니고. 어쨌든 이들의 정책은 이러한 양상들을 가지고 있었고, 조비와 조예 시기까지만 해도 효과적으로 운용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조예 시기에는 오히려 이를 이용해 황제권이 꽤나 강력한 우위를 점하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 우위를 점하는 정권은 이후 수 양제나 측천무후가 나오기 전까지 없었을 정도랄까요. 조예가 맨날 축성만 한다고 특기도 축성을 줄 판입니다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황제권이 강하다는 증명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뭐, 약간 딴 얘기입니다만, 조예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이후 역사의 판도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조예가 워낙 사람을 안 만나서 대체 정체를 알 수 없었다가, 유엽이 만나고 와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 "진황과 한무와 동류이지만, 자질은 그보다 미약하다" 그냥 진시황, 한무제만큼의 모습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라, 이는 조예가 그 옛날 법가, 법술적 황제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대규모 축성이라든지 하는 것도 진시황, 한무제 등이 하던 양상과 유사합니다. 실제로 그의 근친정치도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요. 조예가 오래 살았다면, 아마 조예는 호족들을 누르고 군현제 중심의 법술적 국가를 재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흠. 조조가 조예를 사랑했던 건 닮아서인지도.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가죠. 여튼 둘 다 참 잘했어요 도장 쾅쾅이란 소립니다. 그러나 이 체제엔 문제점이 있습니다. 바로 중심추, 즉 황제 자신입니다. 황제가 유능하고 정치적 술책에 능하다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적절히 조율할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황제가 무능하다면?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리다면? 미소 냉전이 둘 간의 세력 균형이 이뤄졌기에 가능했다가 결국 자본력에서 공산주의권이 밀리면서 무너져내렸던 것처럼, 한쪽 세력이 강하다면 이 체제는 삽시간에 무너져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손권 이후 제갈각이 무너지고 손준이 단독 정권을 잡으며 패악을 부린 것은, 무엇보다 중심추를 잡아야 했던 손량이 너무 어렸기에 터져나온 문제였다고 봐야 합니다. 중심추가 단단하게 서 있다면 양측 모두 눈치만 보며 황제의 총애를 더 받기 위한 경쟁 관계에 있어야 하지만, 중심추가 약해지면 얄짤없이 무너져내리는 거죠. 그리고 조예의 너무 이른 사망으로, 조위 또한 손오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고야 맙니다. 바로 조상과 사마의의 대립입니다.

 

 

조예는 지금까지의 균형 원칙에 따라 보정 또한 균형 있게 양 파의 수장들을 임명합니다. 조진의 뒤를 이어 친위파의 거두로 성장한 조상과 조조 시대 때부터 호족파의 대표격이 되었던 사마의가 그들입니다. 하지만 연배, 역량, 명망 모든 부분에서 조상은 사실 사마의의 시합이 되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조예가 바보였던 걸까요. 그러나 사견입니다만, 조상은 그리 무능한 인물까지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열세를 한번에 뒤집는 것에 성공하죠. 건담과 맞서싸웠던 먼치킨 사마의를 상대로 선빵을 날린 것입니다. 보정으로 임명된 순간 이미 조상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평범한 방식으로 놔두다간 결코 사마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요. 이에 초반에 승부를 내야 한다고 판단했던 조상은, 갓 등극한 황제에게 사마의의 태부 임명을 건의합니다.

 

태부, 황제의 스승이라니 말은 참 좋습니다. 직위 상으로도 삼공보다 위이니 더할 나위 없죠. 그러나 그뿐입니다. 참고로 제갈각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갈각은 대장군이자 태부였죠.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그냥 태부라 하면 이것은 황제의 자문 역할일 뿐이고, 아직 황제가 어려 보정이 수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황제의 자문이라는 건 실권은 아무것도 없는 직책임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직책 자체는 그럴 듯하니 거부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마의는 말 그대로 벙찝니다. 어린 놈이라고 얕봤다가 초반 저글링 러시도 아니고 파일론 지어서 일꾼을 다 막아버린 노릇이니 미칠 판인 거죠.

 

물론 사마의가 그렇다고 호락호락 당할 위인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그는 자타 공인 베테랑이었고, 삼국분립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군권을 완전히 박탈당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침 손오의 공격이 있었고, 그때를 기회로 다시금 실력을 발휘합니다. "난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나 조상이 견제하고 있는 것이 뻔한 마당에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결국 사마의가 선택한 것은, 사마의가 참 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죠.

 

 

한편 조상도 여기서 그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빵 덕에 어느 정도의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명망에서 사마의에 비견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상태로는 쉽게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렇다면 이걸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마의의 명망의 기원을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합니다. 사마의가 호족 사대부의 대표인 것은 집안의 문제도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죠. 바로 군사적 역량이었습니다. 그는 촉한 제갈량과의 대립 과정에서 훌륭히 수비를 해내었고, 그 과정에서 얻은 명망이 엄청났습니다. 그렇다면 조상이 선택할 것도 동일합니다. 바로 전쟁이죠.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게 사마의입니다. 내가 나간 사이 뒤를 치면 어떡하지? 의심하는데 의심을 북돋아주다가는 단칼에 목이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사마의는 와병 중으로 위장하고 버팁니다. 일단 의심 안 받는 게 상책이니까요. 일단 조상은 그 모습을 보고 안심하고 촉한 정벌을 진행합니다. 여기서 조상이 어느 정도라도 이겼으면 좋았을 건데, 촉한이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사실 이 시기 모든 전쟁에서 승부의 최대 관건은 적군과의 대치 상황이 아니라, 지형과 날씨입니다. 정사에서는 이 부분에서 관중 지역에서의 인마 및 병량 징집 과정에 따른 착취 등을 중심으로 다뤘습니다만, 사실 이러한 식의 행위는 어느 전쟁에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형적 불리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대치 상태로 갔다는 것, 그리고 이맘 때 드는 장마로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조상은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 실컷 끌고 가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으니 치욕이죠, 이쯤 되면. 그러나 조상의 권위는 내부적으로 좀 손상은 있을지 몰라도 외면적으로만 보자면 그렇게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5년 후 조상이 황제와 함께 고평릉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을 때, 그때쯤엔 이미 사마의는 안중에 없는 상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48년 이승이 사마의를 정탐했을 때는 이젠 와병을 넘어 치매 흉내를 내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안심했을 때가 바로 절호의 기회, 사마의가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이었습니다. 조상 일행이 부교를 넘자마자, 사마의는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을 장악하고 태후의 명으로 조상 형제를 반역죄로 몰아버립니다. 참고로 여기서 태후의 명이 그만큼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 협박에 의한 것이긴 합니다만, 보정 체제는 기본적으로 임조칭제의 구도와 같이 간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즉 황제가 어릴 시 황제를 대행하는 것은 분명 보정이지만, 임조칭제 때처럼 그 보정 뒤에는 또 태후가 있는 것이지요. 황제-태후-보정, 이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상을 바보라고 부르는 한 사례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환범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면입니다. 환범은 계책을 써서 빠져나온 후 조상에게로 달려가, 성으로 돌아가지 말고 수도 밖으로 나아가 군사를 모집하자는 안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조상 형제들은 계속 고민한 끝에 이걸 포기하고 성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고 조상 형제의 유약함, 아둔함을 이야기합니다만, 체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또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군현제의 약점, 그리고 당시 사회가 호족 사회라는 측면입니다.

 

법가적 체제인 군현제, 유가적 체제인 봉건제. 황권은 당연히 군현제 쪽이 강합니다. 근데 왜 강할까요? 중앙에 권력이 몰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당연한 소리죠. 하지만 중앙에 권력이 몰려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뭘까요. 역시 간단합니다. 힘이 중앙에 있기 때문입니다. 힘은 뭘까요. 군대입니다. 가장 강력한 군대가 중앙에 있으니, 당연히 중앙의 힘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봉건제와는 다릅니다. 봉건제는 오히려 중앙의 군대는 빈약하고 제후들의 사병이 주가 됩니다. 그러나 군현제는 강력한 중앙군을 기반으로 하며, 그 외 지역의 군대는 거의 보초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위는 군현제 국가였죠.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대체 조상은 어딜 가면 중앙군을 누를 병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중앙군이 국경까지 가서 싸우냐고 묻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중앙군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예전 보정과 장군호에 대한 글을 보셨나요. 중국의 관료들은 황제로부터 장군호와 지절을 내려받은 후 그를 통해 군대를 징집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 즉 전쟁 상황에 맞춰서 지방군이 결성되는 형식입니다. 그렇다면 조상은 군대를 모을 수 있습니다. 보정을 수행하고 있으니 장군호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조위의 황제가 그 곁에 있습니다. 그 옛날 조조와 같은 협천자의 상황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상은 지방으로 가서 군대를 모으면 됩니다. 참 간단한데 왜 그걸 못하겠다고 그냥 항복했을까요? 이상하죠? 조상이 바보라서? 하지만 부득불 조상이 바보라고 우기시더라도, 조상의 동생 조희는 조상에 대해 간언했다고도 나오는 등 그렇게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당시 사회의 문제점입니다. 지방에서 병사를 징집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물론 조상은 정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을 현실적으로 다스리고 있는 건 누구일까요. 관료제 사회라고 해서 국가가 원하는 대로 관료 사회가 딱딱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직책상으로는 사또가 위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방 장악에선, 사또가 위일까요 아니면 이방, 호방 같은 향리들이 위일까요? 지방 백성들을 병사로 징집하고자 했을 때, 그들은 황제를 따를까요, 아니면 그 지역의 유지, 즉 호족을 따를까요? 당연히 호족을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지금 조상이 싸우고 있는 상대가 누구냐는 겁니다. 예, 바로 호족의 우두머리인 사마의인 것이죠. 즉 도망가서 병력을 모아 싸우기 위해서는, 호족의 우두머리를 치기 위해 호족의 힘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앞에서 조예가 너무 일찍 죽은 게 안타깝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문제는 조예가 오래 살았다고 해도, 이후 어린 황제가 등극했을 때 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안타까울까요?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너무 일찍 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호족의 우두머리를 쳐야 하는 상황이라도, 황제의 권위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협천자의 힘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을 얻기 전에도 유비는 어떻게든 조조와 맞서 싸웠습니다. 한실재흥이란 말이 통했거든요. 그런데 이때는 다릅니다. 왜일까요? 조위는 후한만큼 오래간 정권을 잡은 집단이 아니라 신흥 정권이었고, 따라서 그 협천자와 조위재흥이란 말이 통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국경 지역의 주요한 친위 세력과 연합할 수는 없었을까요. 하지만 이 시기 촉한, 손오와의 전쟁은 어느 정도 소강 상태였고, 게다가 상대는 군대에서는 신적인 존재였던 사마의였습니다. 그들에 대한 헤게모니를 누가 장악하고 있었을지는 당연합니다. 그럼 촉한, 손오로 도망치는 안이 있겠습니다만, 그랬다가는 조위 자체를 끝장내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죠. 뭐, 만약 그렇게라도 했다면 참 재밌었을 것 같긴 합니다만, 조상의 선택은 그래도 조위를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환범의 아이디어는 그 당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책이 아니라 그나마 희망이라도 걸어볼 수 있는 안이었습니다. 혹시 모르니까요. 그러나 그것을 선택했을 시엔 자칫하면 황제까지 위태로워질수도 있는 안이었습니다. 이미 그렇게 빠져나가는 순간 태후의 명을 빌미로 사마의는 신황제를 세웠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위의 분열이 필연이었고 그나마 이길 가능성도 희박한 싸움이었습니다. 또한 호족들의 근거지인 지방으로 빠져나갔다가 자칫하면 그 호족들에게 자신들이 밟혀버리는 상황도 가능했습니다. 즉 불확실성과 위험 요인이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조상의 선택은 적어도 조위를 아예 그 대에서 말아먹지는 않을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뭐, 역사에 if란 없습니다. 어쨌건 조상은 항복했고,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호족의 수장 사마의가 전권을 잡았습니다. 군주와 호족 간의 기나긴 투쟁 끝에, 드디어 호족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죠. 그리고 이제 역사는, 호족 왕국 진의 시대로 넘어갑니다.

 

 

 

다음 글이 드디어 마지막이 될 듯하네요. ㅎㅎ

 

이제 반입니다 완결까지 몆화만 남았지만요....

 

 

글 쓰다 중간에 사라져서 죄송합니다. 삼국지 11 패치 만들던 게 막바지에 달해서 그거 완성하느라 날짜를 좀 날려먹었네요. ㅎㅎ;; 근데 오늘은 난 왜 집에 틀어박혀 있긔. 엉엉. 어쨌든, 다시 시작합니다. 그 전 내용 까먹으셨으면 내용이 이어지니 기왕이면 한번 더 읽어주시고요. 허허. -_)

 

 

 

B. 그 조조의 사정

 

조조에 대해서는 참 할말이 많네요. 과연 이번 글에서 끝낼 수 있을까요. 흠.

 

조조 세력에서 호족 세력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순욱, 순유, 곽가 등등이 모두 호족 세력이죠. 그리고 그 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조조는 엄청난 성장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공, 위왕을 칭하면서 순욱, 순유 등이 제거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융, 최염 등이 제거당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조조의 성공은 이러한 숙청을 별 무리없이 성공적으로 진행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거된 이후에도, 조조 군은 여전히 최강의 군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기에 원소의 호족 제거 정책은 실패했고, 조조의 호족 제거 정책은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고, 이후 상황을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부분이 나타납니다.

 

조조는 확실히 자기 대에 효과적으로 호족들을 숙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조 군의 이 문제가 종결된 것은 아닙니다. 진군의 구품관인법을 기반으로 호족 세력들은 암암리에 칼을 갈고 있었으며, 수장 격이었던 순욱, 공융, 최염 등이 제거당했음에도 사마의를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의 기반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조조는 삼고초려(?)를 통해서 사마의를 등용했음에도 그를 중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대해 사서 등에서는 사마의와 조조의 성격적 문제로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이것은 조조가 사마의를 어떻게든 곁에는 두고 쓰지는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일종의 감시라고 해야 할까요. 사마씨 집단은 그 시기 가장 유력한 호족이었고, 그 중에서도 야심 만만했던 사마의는 어떻게든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생각해보면 구품관인법은 참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사실 구품관인법의 시작은 기존 향거리선제 시스템이 지방관의 추천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지방 정치가 붕괴된 시점에서 중앙이 추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의 관리인 중정이 추천을 대행하는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조는 이 제도를 통해서 중앙의 힘을 강화하고, 호족 체제를 붕괴시키길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결과는, 오히려 호족제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전체 호족의 차원에서 보면 어느 정도 붕괴를 시키는 것에 성공했지만, 대신 중앙에 위치한 호족들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다 보니 몇몇 유력 호족들이 전체를 지배해버리는, 귀족 사회로의 발전 양상을 보여주게 된 것이죠.

 

이러한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조식과 조비의 후계자 분쟁이었습니다. 왜 조조는 조식을 그토록 총애하고 밀어주려고 했을까요. 그냥 재주가 뛰어나서? 예, 뭐 그렇기도 하겠습니다만, 정확히는 그 재능의 종류에 문제가 있습니다. 조비의 재능 또한 조식에 비해 결코 뒤지지는 않았습니다. 건안칠자에 둘의 이름이 모두 들어가는 것은 괜한 이유가 아닙니다. 게다가 가장 후계자로서의 정당성이 있는 조앙이 죽은 시점에서, 조비는 후계자로서의 정당성까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가후가 말했던 원소, 유표의 사례를 조조가 몰랐을까요? 그 또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비가 약간 재능이 떨어진다고 해서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정당한 후계자인 조비를 밀어주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왜 조식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호족들의 두 성향 중 하나, 그들이 사대부라는 측면입니다.

 

조비의 재능은 유가적인 성향이 강했고, 조식의 재능은 문예 쪽이었죠. 사대부들, 즉 호족들의 문화 기반은? 유가입니다. 조조의 호족 억압 정책은 바로 이 부분에서 출발합니다. 조조의 구현령은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데요. 조조의 인재 정책이었던 유재시거, 오직 능력만이 추천의 기준이라는 이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현대적 관점에서 뛰어난 정책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이전에 유재시거가 공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유가입니다. 애초에 유재시거라는 말 자체가 유학에 대한 모욕이며, 이 시기 인간에 대한 관점에 대한 배역입니다. 이것은 이 시기의 능력을 보는 기준이 현대와 달랐던 점에서 기인합니다.

 

유학에서의 능력이란 재능과 함께 유가의 덕성을 갖춘 것을 요구합니다. 아니, 오히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재능은 능력이 아닙니다. 유가의 덕성을 갖춘 것이 곧 능력이었습니다. 또한 유가적 관점에서 사람들의 본本, 즉 인물의 가문 등은 곧 능력이었습니다. 이를 가격家格이라고 합니다. 서양의 합리적 사고관에 익숙한 현대의 사람들에게 이는 이해하기 힘든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 또한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집안이 승상직을 3대째 해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럴 경우 그 집안이 또 국가의 중대사를 맡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능력 본위라지만 이를 가문을 중심으로 보게 되면, 그 가문은 그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왔고 그만한 노하우의 전승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구축한 타 가문들과의 네트워크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개인의 차원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하지만 분명한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것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유가적 사회에서의 인간은 결코 동등하지 않으며, 순전히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본위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배경적 차이가 결국 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딱 보기엔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시대의 사고 방식으로 보자면 충분한 합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가에서의 인간이란 단순한 개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사회에 소속된 인간이며 그 사회적 배경이 중시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더 현대적인 관점일 수도 있습니다. 서구 데카르트 이후의 분리적 사고가 아닌 포스트모더니즘의 통합적 사고로 판단했을 때, 이는 상당한 합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조조는 이 명제에 대해 공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옳은 것일까요? 이러한 부분에 대한 판단은 잠시 접어둡시다. 그렇다면 왜 조조는 이렇게 했을까요? 체제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것은 단순히 능력 본위의 문제가 아니라 호족 사대부 세력에 대한 정면공격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예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그들의 세력을 꺾어놓으려는 속셈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하여, 기존 세력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기존의 유가가 가지고 있던 능력 패러다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유재시거를 넘어서는, 동시에 기존 세력들도 어쩔 수 없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능력 패러다임을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문학입니다.

 

현대의 인식에서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에서 문학적 재능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즉 유학자들의 기존 패러다임에서도, 문학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재능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내려주시는 것, 즉 천명이라는 것이 개입하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학에 능한 인물들은 그만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인식했고, 건안문학으로 대표되는 문학의 강화는 유학자들로서도 차마 뭐라 하기 힘든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어갈 대표로, 문학적 재능이 특출났던 조식을 후계자로 내세웠던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실제로 조식은 우리가 볼 때 칠보시 정도 말고는 그렇게 인식을 못 해서 그렇지, 두보 이전까진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보유했던 인물이었습니다(두보가 나오면서 그 시성의 이름을 두보가 가져가게 됩니다). 정치적 분야에서 제대로 활약을 못했던 게 한계였지만요. 약간 다른 얘기지만, 이러한 호족 사대부들과 군주층의 능력 패러다임 대결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수당대에서 송대에 이르는 시기 과거제의 변화 구도가 대표적인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그러나 조비, 조식 간의 대립의 승자는 결국 조비였습니다. 호족 사대부층의 지지를 얻고 있던 조비와 새로운 패러다임을 대표하던 조식 간의 대립에서 조비가 이겼다는 것은, 결국 조조 또한 호족 사대부를 완전히 꺾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조비 자신이 이러한 사대부의 지지층을 통해 올라온 인물인 만큼, 조비의 정책도 친호족적 요소를 내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어나는 각 인물들의 패턴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조비를 지지하던 층은 사대부층을 대표하던 진군, 사마의 등이었고 조식을 지지하던 층은 새롭게 떠오르던 신진 재사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조조의 친위 세력이었던 무장 집단들의 지지와 함께, 가후로 대변되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타 호족층의 지지 구도였습니다. 그리고 가후가 조비의 편을 드는 순간, 더 이상 조식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오히려 국가의 분열을 조장해서 더 큰 위기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걸 판단한 조조로서는 어쩔 수 없이 조비를 택하게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원소의 반호족 정책은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여러가지 좋게 평가할 요소들을 찾아보려고 해도, 결국 그 결과는 원소군 자체를 완전히 분열시키고 국가를 멸망에 몰아넣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성공했을까요? 조조는 그보다 좀 더 교묘하게 실시했고, 그래서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조비와 조식 간의 후계자 갈등에서, 결국 그가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비였습니다. 결국 조조가 뒤엎길 원했던 기존의 패러다임이 조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눌러버렸고, 이후 중국은 이러한 호족 사대부들 중 유력한 몇몇 가문들이 중심이 되는, 문벌 귀족 사회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즉 원소의 과격한 방식은 물론 조조의 교묘한 방식도 이 흐름 자체를 뒤엎는 것은 실패했고, 결국 이 실패가 이후 사마씨 정권의 등극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조비와 조예 시기의 정책들과 이 사마씨 정권으로의 이양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추가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C. 그 유비의 사정

 

원소, 조조가 호족층과 계속 충돌했던 것에 비해, 유비의 방식은 어쩌면 더 교묘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유비의 능력이 조조에게는 차마 미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개인의 능력이 미치지 못했던 것 때문에 방식 자체는 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참으로 기묘한 구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묘한 정치 구도는 그의 아들 유선의 대, 촉한이 결국 파탄날 수밖에 없는 구도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유비 또한 실패한 셈이라고 해야 할까요. 생각해보면 이 글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이 글들은 태양은 오직 하나여야만 한다는 이상 하에 권력의 확고화를 추구했던 당시의 군주들이, 그 과정에서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모습들을 보여주는 글이라고 보셔도 무방하겠습니다.

 

우선 유비군의 구도를 살펴보죠. 원소와 조조군 이상으로, 유비군은 분열 요소를 항시 안고 있었습니다. 일단 유비군은 관우, 장비, 조운으로 대표되는 유비군의 친위 유협 세력을 중심으로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갈량, 방통, 마량 등으로 대표되는 형주 호족 세력과, 이후 익주를 병합하면서 유입되었던 법정, 오의, 황권 등의 익주 호족 세력으로 구성됩니다. 이 세 세력 안에 속하지 못한 세력으로 마초, 마대 등이 있기는 하나, 마초처럼 이후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거나 아니면 마대처럼 세력 내로 흡수되는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어쨌든 이 거대한 세 개의 세력에서, 유비는 참으로 교묘한 정치적 술수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냅니다.

 

원소의 실패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친위 세력에 기대어 호족 세력을 탄압했고, 그 과정에서 결국 붕괴에 이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의도 자체는 국내의 혼란을 깨고 군주 중심의 체제 수립에 목적을 두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어쨌건 그것은 멸망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렇다면 조조의 실패는 무엇이었을까요. 조조는 친위 세력에 기대는 전술로는 결국 붕괴를 초래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모두가 거부할 수 없는 새로운 신세력을 만들어서 그들 휘하로 기존 세력들을 흡수시키려는 전술을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술 자체가 안정기에 어느 정도 이르기 전에는 사용할 수 없었고, 안정기에 이르면 기존 세력들이 강고해져서 이것을 쉽게 뒤엎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유비는? 유비는 아예 세 세력을 공존시키는 전술로 나아갑니다. 어떻게 보면 도가의 무위적 정치 방향, 마치 그의 선조 유방의 전술을 보는 듯한 느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아가서, 유비는 세 세력 모두에게 자신과의 인간적 연계성을 도모하여 전체를 자신 휘하의 유협 집단으로 통합해버립니다.

 

유비와 친위 세력 간의 연계는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유비가 정말 관우, 장비와 의형제 사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실 친위 세력의 특성상 이미 인간적 연계로 맺어지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의형제였던 아니건 간에, 유비가 관우, 장비, 조운 등에 대해 엄청난 인간적 연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형주 호족의 수장이었던 제갈량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죽으면 제갈량 보고 군주를 대신하라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던 유비는, 사실 그 술책의 교묘함에서 어찌 보면 원소와 조조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그 말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유비는 조조나 원소에 비해 '민民'으로서의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고 그것을 적절히 활용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남이가"입니다. 제갈량도 그렇기에 유비의 말에서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건, 유비의 말을 충실하게 수행합니다. 익주 호족과도 마찬가지입니다. 황권이 위에 항복하면서도 유비가 자신의 가족을 죽이거나 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것, 그리고 유비 또한 그렇게 했던 것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유력 호족이었던 오의의 딸과 결혼하면서 인적 관계를 더욱 강화시킵니다.

 

유비의 방식의 요체는 간단합니다. 군주로서 군림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었던 원소, 조조는 결국 실패합니다. 군림이 목적인 한 군림자와 피군림자 간의 대립 구도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유비는 이러한 정치적 패러다임 싸움보다는 민간 사회의 사회적 연대에 더 친숙했던 인물이었고, 그것을 정치에 완벽하게 활용합니다. 촉한 전체에서, 유비는 다스리는 지배자가 아니라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형이었습니다. 아버지처럼 군림하지조차 않습니다. 형입니다. 큰형이 동생들한테 대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모두의 의견을 듣고 같이 웃고 같이 화내던 인물이 바로 유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비군 내부에서 서로간 분열 요소가 있더라도, 적어도 그들의 목적은 하나로 통일됩니다. "우리 형을 밀어주자". 유비의 통치 방식은 그런 점에서 매우 교묘합니다. 그것이 유비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방식 덕에 적어도 유비가 죽기 이전까지의 촉한은 유비에 대한 의와 협이라는 단단한 구도에서 굴러갈 수 있었습니다.

 

약간은 안타까운 부분입니다만, 이릉전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관우, 장비가 그렇게 유비란 인물에게 개인적으로 소중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도에 봤을 때, 유비는 이릉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모두에게 의와 협으로 뭉치도록 만들었던 유비 집단에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세력에 대해 공격하고 그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세력은 당연히 공격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기존까지 쌓아왔던 의와 협의 기준 자체가 붕괴할 수 있습니다. 말만 번드르르하고 행동으로 그것을 대변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죠. 유비는 항상 행동으로 보여주었었고,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이미지와 현실이라는 둘 사이의 딜레마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지를 중시할 경우엔 현실 문제가 발생하지만, 현실 문제를 중시하다가 이미지가 붕괴되면 더 큰 현실 문제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후 글을 쓰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은 이래저래 위험한 요소를 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미지를 고수해야 하는 것 때문이죠.

 

어쨌건 원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유비의 방식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한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실 중흥의 기치를 통해 조조라는 확실한 적이 상정되면서, 유비군은 더욱 단단하게 뭉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죠. 내부의 문제를 해소하기 가장 좋은 방식은 외부에 적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조조라는 확실한 적을 두고 유비는 그에 반대되는 패러다임을 강화시킵니다. 조조가 강하게 나오면 유비는 부드럽게 움직이고, 조조가 군주로서의 권위를 세울수록 유비는 친우로서의 부드러움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양면적 패러다임을 통한 헤게모니 싸움은, 유비 군의 통합성을 더욱 증대시키는 것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비 사후에 터져나옵니다. 이러한 구도는 오직 유비에게 귀속될 뿐, 그 아들인 유선에게 귀속되는 구도가 아닙니다. 유선의 능력이 정말 출중해서 이 구도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었겠죠. 그러나 유선의 능력이 아주 아둔했다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만, 그것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유선의 관점에서 봤을 때 당시 촉의 모든 세력은 아버지의 신하일 뿐 자신의 신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너무 격의 없는 형제와 같은 사이였기에, 유선의 시대가 되었을 때 유선의 위치는 군주이면서 전체의 가장 아래에 놓이는 희한한 구도로 나타납니다. 아버지와 형제인 신하들 사이에서 유선은 뭐가 될까요. 신하들의 조카가 됩니다. 이것이 유선이 안고 있었던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제갈량은 유비의 이러한 요소들 중 외부의 적을 만들고 하는 부분을 잘 이해했던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북벌 또한 그러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제갈량은 유비의 더 거대한 능력이었던, 전체를 유협집단화하고 그 모두 위에 있었던 유비의 도가적 교묘함까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이해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그것을 활용할 순 없었습니다. 일단 자신이 군주가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그것을 유선에게 전가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유선이 보여줘야 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가야 할 부분이었던 것도 있지만, 제갈량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완벽주의적 성향과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듯 싶습니다. 제갈량 자신이 지나치게 완벽함을 추구했고, 자신이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보입니다. 사마의에게 사신을 보냈을 때 제갈량이 엔간한 판결은 자신이 내린다고 했던 것이 대표적이죠. 이런 제갈량이었기 때문에 유비와 같은 방식의 리더십 구축은 제갈량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후 구도에서 제갈량은 유선의 권위를 세워주지 못하고 자신의 사후까지, 유선이 특정 인물을 계속 의지하도록 만들어버리기에 이르고 결국 이 구도는 군주와 신하의 위치까지 뒤바꾸게 만듭니다. 동윤이 유선을 꾸짖었던 것은 이것의 가장 극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부분은 사실상 유비가 자초한 것입니다. 애초에 의협 집단으로 구성되어버린 촉한에서, 이 국가의 유지는 오직 유비 개인에게 귀속됩니다. 유비라는 개인에 대한 연대로 맺어진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유선이 취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강력한 신하들 앞에서 확고한 역량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든가, 아니면 새로운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첫번째 방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유선에게 그럴 만한 자유도가 별로 없었고, 유선 자신도 그렇게 험준한 인생에 있었던 인물이 아닌 만큼 그러한 경험과 역량을 쌓을 기회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갈량이란 인물이 다 해 버리니 기회조차 나올 수 없었죠. 그렇다면 후자의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고,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황호와 진지입니다. 여기서 환관인 황호를 선택한 것은, 생각해보면 전한, 후한의 황제들이 택한 방식과 동일합니다. 황제들의 입장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어찌 됐건 자신의 수족인 환관입니다. 게다가 신하들이 전부 아버지의 신하였기에 끌어들일 수 있는 이는 없었고, 그나마 믿을 수 있던 아버지의 친위 세력이었던 관우, 장비, 조운 등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 자식들은 능력의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호족들의 세력에 막혀서인지 그다지 큰 세력으로 발돋움할 수 없었고요. 그렇기에 자신의 친위 세력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환관들을 끌어들였지만, 여전히 신하들의 세력이 워낙 컸기에 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하들의 세력이 커진 것 또한 유비가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유선이 노력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촉한 멸망 당시 장비의 아들 장소, 관우의 손자 관이 등은 유비의 친위 세력에서 기인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나마 호족 사대부들보다는 유선과 연대를 맺을 가능성이 있었던 인물들입니다. 유선이 장비의 딸 장씨와 결혼한 것도 맥락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관우, 장비의 사망 이후 유비의 친위 세력은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상실했고, 조운은 제갈량과 연합하였기에 완벽하게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일 수 있는 세력은 아니었습니다. 장소, 관이 등의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호족 중심으로 구성된 촉한 사회를 뒤엎을 정도의 역량도 아니었고, 그만한 활약을 벌일 기회도 없었습니다. 유선의 친위 세력 형성 시도도 결국 그 기회를 잡지 못했기에 그 정도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유비의 방식 자체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강대한 조위에 맞서서 촉한이 오래간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어쨌든 유비의 방식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에까지 이어지기에는 어려운 방식이었습니다. 순전히 정치적 관점에서만 볼 때,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정권을 계속 유지한 것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권위와 절대적 역량을 가진 창시자의 뒤를 잇는다는 것은 어려우며, 게다가 그 권위와 역량이 친애의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상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촉한의 시작은 유비의 방식의 성공에서 비롯되었지만, 촉한의 실패 또한 유비의 방식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하는 것이지요.

 

D. 그 손권의 사정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손권의 방식이야말로 참으로 교묘하다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손권의 상황은 어찌 보면 유선의 상황과 상당 부분 동일합니다. 손견, 손책의 방식은 생각해보면 유비의 방식과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정보, 황개, 한당, 조무와 손견의 관계가 철저히 유협집단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고, 손책과 주유의 관계 또한 유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국을 손권은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즉 조조와 유비 같은 1세대 군주로서가 아니라, 2세대 군주로서 좀 더 교묘한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는 문제가 손권의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드라마 신삼국을 보시면 엄청난 규모의 재해석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내용들을 보며 이건 아닌데, 아, 이건 참 좋다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그 중에서 정말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부분은, 손권과 주유 간에 벌어지는 알력 관계의 측면을 다루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정말 그랬는가에 대해서는 지금 시점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 부분은 상당히 그럴 듯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손책의 말은 유비의 말만큼이나 압박입니다. 유비가 유선에게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섬기라고 한 것도 사실 유선의 입장에선 참 난감한 일이죠. 그럼 난 뭐하라고? 손책은 내부의 일은 장소에게, 외부의 일은 주유에게 상의하라고 말합니다. 유선과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그럼 난 뭐하라고? 아버지가 죽어가면서, 형이 죽어가면서 그러라고 말하니 그러라고는 했다만, 이렇게 되고 보니 이게 군주와 신하 관계인지 아니면 제자와 스승 관계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적벽 이전의 판도는 아무래도 나오는 내용이 적으니 알기 힘듭니다만, 실제로 적벽대전의 과정과 주유가 죽기 직전까지의 모습은 손권이 딱히 개입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손권의 이름이 있지만 주유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죠. 군주라면 마땅히 화를 낼 만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손권은 그에 대해 대체로 그러려니 하면서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주유 이후에도 그러한 체제는 이어집니다. 노숙, 여몽, 육손에 이르기까지, 손권은 아주 무난하게 흐름을 지속시킵니다. 그들에 대한 지원은 확실하게 해주지만 딱히 간섭하지 않습니다. 사실 손권의 군사적 재능이 부족했던 것도 있다고 봅니다. 합비에서의 실패는 단순히 장료 등이 잘 막은 것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이기지 못했던 것은 손권이 그를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했던 것도 요소 중 하나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군주로서 그가 발휘한 수완은,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호족 세력이 강대했고 창업자로서의 위상조차 없었던 손권이, 동오라는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했던 것은 대단한 것이죠, 사실.

 

이러한 손권의 방식은 바로 호족 세력을 인정하고 그 세력 사이에 융합하는 전략이었습니다. 동오의 가장 큰 문제는 타 세력들이 분열 요소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동오는 양주라는 지역 하나로 뭉쳐서 분열 요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오히려 문제였습니다. 세력의 응집력이 강하기 때문에 권력 관계를 이용한다거나 하는 방식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죠. 그렇기에 손권은 자신 또한 유력 호족이었던 손씨 집안이라는 것을 이용, 그 세력들과 마치 하나인 것처럼 하여 그들의 패러다임을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 군주들 중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동오는 그러한 구도를 통해 평화를 이룩했고, 이후 동오의 평화는 남북조 시대 남조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까요. 그 이전까지 별볼 일 없었던 남조 지역의 융성 기반은 바로 이때 닦여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결국은 문제였습니다. 원소, 조조, 유비의 방식은 어쨌건 군주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손권은 더 이상 군주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구도 속으로 들어가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엄연히 군주는 맞죠. 그러나 군주가 결정하지는 않고 전체의 이익에 따라 결정될 뿐입니다. 호족 세력 속의 융합을 통해 그렇게 큰 충돌 없이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통일을 위한 대업의 성취라든가 하는 군주로서의 권위를 세우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뒤집히는 시점은 이 동네도 역시나 후계자 갈등 문제였습니다. 특히 손패를 지원했던 것이 강동 4성으로 대표되는 강동 호족층이 아니라 보즐, 전종 등의 신세력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물론 손패가 그들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손등에서 손화로 이어지는 정통 구도는 육개, 고옹 등 강동 4성의 중심 인물들의 후원을 받고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손패를 지원했고, 그래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리고 이 구도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손권이 엄청나게 환영할 만한 구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분열 요소가 거의 없었고 그렇기에 강동 호족 세력에게 고분고분한 모습만 보여야 했던 손권의 입장에서, 이것은 오히려 전환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손권이 그렇게 유도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생각했을 가능성은 분명 상존한다고 봅니다. 이에 손권은 말년에 이르면서 대규모의 숙청을 감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심지어 국가의 동량이었던 육손을 쳐내기에 이릅니다. 사실 육손은 낮은 직위부터 승상의 직까지 올라온 만큼 자수성가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부분이 있지만 엄연히 가장 유력한 호족 세력인 육씨 일가의 한 명이었고, 자수성가 이후에는 구 세력의 수장격으로 올라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육손을 쳐냈다는 것은 손권이 호족들에게 그저 고분고분하기만 했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그전까지는 했던 걸까요? 그만큼 쌓인 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노망의 결과가 아니라, 어쩌면 손권이 그 이전까지 그토록 열망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손권이 술주정이 심했던 것도, 그 이전까지 호족들에게 눌려왔던 분노를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강건한 호족 세력들을 다 쳐내기엔 역부족이었던 것도 사실이고, 새롭게 등장한 세력 또한 엄연히 호족 세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손화, 손패를 모두 쳐낸 것은 그들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끊기 위한 행위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손권이 죽으면서 전혀 기반이 없었던 손량을 후계자로 내세우고, 손준을 보정의 한 명으로 위임한 것은 상당히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이러한 구도 자체를 모두 끊고 손씨 중심의 군주 체제로의 전환 의지를 선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기존 호족이 더 강경한 세력인 만큼 보즐, 전종 등의 중용은 당연한 것입니다만, 그럼에도 정국은 점점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제갈각 등이 같이 임명되기에 완전히 그렇게만 볼 수 없다고 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갈각 또한 유력 호족은 아니더라도 호족 사대부의 한 명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 또한 이후 조비의 정책을 얘기하면서 다시금 다루게 되겠지만, 일종의 균형의 유지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즉 호족 사대부의 대표격인 인물과 친위 세력의 대표격인 인물을 동시에 보정으로 임명함으로써 호족 세력을 내부로 흡수하고, 동시에 친위 세력도 강화시키는 전략의 일환으로 보아야 합니다. 특히나 유력 호족이 아닌 제갈각이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는 것은, 강동 4성의 약화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부분인 동시에 약간 비약을 하자면 이후까지 내다본 안목의 결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손준이 제갈각, 주이를 친 것 또한, 그 맥락에서 적절한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어쩌면 손권이 예상한 범주 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손준, 그리고 손침이 그 과정에서 너무 커버려서 오히려 군주인 손량을 누르기에 이른다는 것이였죠.

 

 

정리해보자면, 손권의 성공과 이후의 변화 구도는 사실 손권과 호족 관계에서 결정난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초반 호족들을 거스르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손권은 그들과 융합, 철저히 수용하는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손권의 진짜 저의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필연적 선택에 가까웠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생기자, 손권 또한 원소, 조조 등과 같은 강경한 숙청 정책을 통해 손씨 중심의 국가 수립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권의 정책 또한 역시나 한계를 낳습니다. 조조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조조 사후 조비와는 달리, 손권 사후 손량 정권에서 확실히 호족 세력은 약화되었고 손씨 중심의 정권 수립이 어느 정도 이뤄졌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조비 정권은 이후 얘기하겠지만 결국 호족 정권으로 이양되었죠. 손권이 손준에게 보정을 맡긴 것은 사실 그들이 손량을 위협하기 전까지만 해도 성공적으로 수행됩니다. 제갈각, 주이 등의 호족 잔존 세력을 모두 꺾었고, 손침 대에 이르면 연합이었던 전씨 가문까지 몰아내며 손씨 독재 체제를 강고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반면, 호족 정권으로 이양되지 않고 독재적 군주 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불안 요소가 상존하게 됩니다. 호족들이 손씨 집안에 충성하는 그 수위가 떨어진다는 문제도 있거니와, 그 과정에서 손씨를 위협하는 또다른 손씨가 나올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측면입니다. 손량과 손준의 관계는 손량에 충성하는 친위 세력의 성격이 아니라 더 깊게 살펴보면 오히려 경쟁자적 구도로의 발전 가능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최종적으로 동오 정권이 붕괴했던 것도 이 혼란 구조를 재편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들어 결국 호족 세력의 힘을 다시금 빌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결국 사마씨 정권에게 잡아먹히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정리입니다. 원소, 조조, 유비, 손권 모두 뛰어난 군주였고 그들은 끊임없이 호족과 군주의 관계에서 더 좋은 포지션을 장악하기 위한 노력을 벌여왔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방식은 일시적 성공은 거두었을지언정, 결과적으로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흐름의 문제였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미 호족들에게로 세력의 판도는 넘어간 상태였고, 이들 군주들은 이러한 상황을 뒤집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닐까요. 결국 이들이 그토록 노력해서 만들었던 국가들은 호족들의 수장이자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던 사마씨에 의해 통일되고야 맙니다.

 

태양은 오직 하나여야만 한다. 진시황 이후 지속적으로 내려오는 패러다임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군주들은 당연히 그렇게 하길 원했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경쟁 세력이었던 호족들을 눌러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오직 하나여야만 하는 시대는, 점점 종말을 맞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어떤 선택을 했다면 그러한 패러다임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왜 그토록 싸워야 했는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조조의 피어린 숙청을 보고 잔인하다고 말하며, 유표와 원소의 예시를 얘기하며 조조가 조식을 선택하고자 한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유선을 보며 아둔하다고 개탄하고, 손권을 보며 노망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체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그들은 이러한 상황들을 해결해나가고자 누구보다 노력했던 이들은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단지 그것이 실패로 끝났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역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잘했느냐 잘못했느냐가 아니라, 왜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상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많이 늦었어요. 죄송죄송 ㅠㅠ

 

다음 글에서는 조위 정권을 중심으로, 군주 중심의 정책이 모두 실패한 시점에서 그 사이를 줄타기하던 이들의 이야기를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글에서 뵈요. ^^

오늘도 삼국지에 관한 공부글을 찾아 올립니다.

3년전에 이런 대학논문 수준의 글을 쓰신분에게 감사할 따름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생각 외로 호응이 좋아서 당황하고 있는 라시엘입니다. 그러고보니 이 글들 이전에 삼국지와 관련된 토론 글 써본 게 다음 카페에서 군대 간다고 하기 전이었으니 벌써 6년 가까이 흘렀네요. 뭔가 제 글에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 닉네임이 하나같이 익숙치 않은 걸 보면 예전 제가 상대했던 분들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어쨌든 군대 갔다오니 심지어 백미도 문을 닫았던 걸 보고 은근 충격을 받았었는데, 여전히 삼국지 쪽에는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구나, 구세대가 좀 빠져나가도 여전히 새로운 물이 들어오는구나 해서 기분이 좋습니다.

 

여하튼 잡설은 이만 하고, 글을 계속 가보죠. 오늘 파트가 사실 가장 재미있는 파트이고, 지난번 글 반응도 그랬지만 이번 글은 생각 외로 많은 분들이 이미 짐작하고 계셨던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바로 군주와 호족 세력 간의 대립 구도입니다.

 

 

3. 태양은 오직 하나여야만 한다.

 

글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에 앞서 한 가지 엉뚱한 질문, 바로 밑에 다른 분이 하셨던 질문을 한번 이어볼까 합니다.

 

여러분은 원소가 천하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저는 어린 시절 삼국지를 접하면서, 원소란 인물의 맛을 잘 몰랐습니다. 솔직히 연의든 정사든 원소에 대한 평가는 썩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조조, 유비, 손견 등에 비교하면 그 위세 등에 비해 임펙트도 약한 편입니다. 항상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인물로서 묘사가 되고, 대체 왜 이 인물이 관도대전 이전까지 하북의 최강자가 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예. 저 또한 예전에는 원소는 천하인이 아니었다, 원소는 그저 별볼일 없이 가문만 믿고 설쳤던 인물 중 하나에 불과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계속 공부하면서, 특히 호족과 황제권의 대립이란 부분을 공부하면서 약간 다른 식의 의문이 점점 솟아올라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실 원소는 우유부단하던 인물이 아니라, 너무 빨리 과감했기에 패배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는,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지금의 저는 그것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호족 세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강조하여 더 말씀드릴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중요한 집단들 대부분은 단순히 호족 집단으로 구성되는 집단들은 아니었습니다. 호족 집단과 대립하는 하나의 또다른 세력, 호족 사대부로서의 이익보다는 군주를 중심으로 뭉치는 하나의 세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협 집단, 또다른 말로는 군주의 친위세력들입니다. 조조 세력의 하후씨와 조씨 세력들, 악진, 전위 등의 무장 세력들이 그들이고 유비 세력의 관우, 장비, 조운 등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이 세력들과 호족 세력들 간의 관계가, 이 시기 어쩌면 모든 사건들의 가장 큰 주범이 아닐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문열 삼국지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그 책에서 은근히 공감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제갈량과 관우 사이의 알력 다툼입니다. 이 부분은 이번에 중국에서 나온 드라마 신삼국에서도 방식은 다르지만 어느 정도 그럴 만한 소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형주를 그것 때문에 내주고 관우를 죽여야만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권력 다툼과는 별개로 형주는 당시 촉의 입장에서 잃어서는 안 되는 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권력 투쟁은 분명히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실제로 관우란 인물은 호승심이 강하고 능력이 뛰어났으며 당시 유비 집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으며, 유비 휘하의 제 2인자의 위치가 제갈량인가 관우인가는 상당히 문제되는 요소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묻겠습니다. 과연 이 둘이 대립했다면 그것은 단순히 둘 간의 권력 투쟁이었을까요?

 

제 생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마치 메리처럼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비 집단은 사실 관우, 장비를 주축으로 하는 친위 유협 집단의 양상이 강했습니다. 이들이 이후 서주 지역을 잠시 점거하면서 서주 호족 집단을 흡수하기는 하지만,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 시기도 짧았을 뿐더러 이미 조조의 공격 때 서주 호족 집단의 정체성이 상당 부분 붕괴되어 그 영향력이 미비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서주 출신이었던 이장이 강동의 이장으로 불리고, 제갈씨 집단은 엉뚱하게 형주로 가있었던 것은 그런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게다가 그나마 유비를 따랐던 호족 집단도 순식간에 자신들의 위치를 잃고 쫓겨다니는 유랑군 신세로 전락하면서 본거지와 거리를 두게 됩니다. 어쨌든 그 덕에 서주 호족 집단이었던 미축, 손건 등은 사실상 호족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유협 집단으로 편승해버리는 결과로 변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제갈량이 들어오면서 이 상황은 확실히 반전됩니다. 제갈량은 본래 형주 출신은 아니었으나 이 시기엔 이미 형주 호족들과의 접점을 가지고 있었고, 유비 정권 수립 과정에서 이후 형주는 뺏기지만 적어도 상당 기간 형주를 지배하는 구도를 취합니다. 서주 호족 때와는 다른 구도죠. 이것은 곧 이 시기를 기점으로 유비 세력이 두 개의 분파로 나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형주 호족 집단과 유협 집단이죠. 그 양측의 수장이 제갈량과 관우였습니다.

 

한편 이는 조조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욱이 들어오기 이전까지의 조조 집단 역시 철저히 유협 집단의 성격을 지닙니다. 비록 유비보다 먼저 자리를 잡았다지만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등은 호족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조조 친위대로서의 성격이 훨씬 강했습니다. 물론 이들과 순욱 등의 호족 집단 간의 대립은 유비 군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있는 것과는 달리, 거의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조의 라이벌이었던 원소 군에서는 상당히 뚜렷하게 나타나지요. 곽도, 봉기 등의 친위 세력과 전풍, 저수 등의 기주 호족 세력 간의 대립의 형태로 말입니다.

 

집단이 두 개더라도 군주의 강한 통솔력으로 하나가 되어 이끌어나갈 수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군주가 아무리 강한 통솔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대립 구도는 언제고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특히 그 문제는 평화기에 심화됩니다. 심리학이나 정치학에서 자주들 얘기하죠. 뭔가 국론 등을 통합시켜야 할 때, 단체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을 설정하면 됩니다. 확실한 적이 있을 땐 쉽게 힘을 모을 수 있습니다. 당장 그 적을 제거해야만 모두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강한 이익 명분이 서니까요. 그러나 평화기가 되면 사정은 다릅니다. 이미 외부의 적이 없어진 상태에서 서로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는 내부에서의 제로섬 게임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군주는 결국 그 중 한 쪽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군주라고 생각했을 때, 이 둘 중 어느 쪽에 힘이 실리는 것이 좋을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친위 세력과 어쨌든 자신들의 권익을 더 중시하는 호족 세력 중에서요. 답은 분명하게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허나 문제는, 이러한 호족 세력들의 힘을 얻지 못하면 국가의 명맥이 위험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어쨌건 전체의 민심과 판도를 잡고 있는 것은 친위 세력보다는 호족 세력입니다. 그들의 인적 네트워크는 물론 민들마저 그들 휘하의 사민화, 사병화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두 세력을 다루는 것은 당시 군주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군주는 최대한 호족 세력의 눈에 거슬리지는 않으면서, 동시에 그 과정에서 친위 세력의 힘을 키우는 방식으로 점차 호족 세력을 억압해나가는 형식의 전개를 해야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특히나 힘이 완벽하지 않을수록, 군주는 어떻게든 호족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됩니다.

 

이러한 관계는 이전에 제가 실컷 떠들었던 황제 중심의 환관 세력과 외척 중심의 사대부 세력 간의 대립과 동일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이 시기는 난세입니다. 그렇기에 문제는 더 복잡해지는 것이죠. 하지만 이 복잡한 양상들을 잘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이제까지 삼국 시대를 보면서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속속들이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한번, 당시 대표적인 군주들의 실패 양상들을 하나씩 살펴볼까요.

 

 

A. 그 원소의 사정

 

원소군은 결국 내분으로 붕괴했다지만 그 근본엔 역시 호족과 친위 세력 간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원소가 전풍, 저수를 배제하고 곽도, 봉기를 지원한 것은 전형적인 유협 집단 힘실어주기 정책의 일환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왜 그랬느냐 가 아닙니다. 우리는 전풍, 저수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인지하고 곽도, 봉기 등을 보잘것 없는 이들로 인지합니다. 심지어 최훈 씨의 삼국전투기에서 곽도는 살리에르가 되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과는 별개로, 중요한 것은 왜가 아닙니다. 왜는 너무 분명하게 대립 구도에서의 힘실어주기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언제"라는 것입니다.

 

시기적으로 원소는 관도대전이 치러지기도 전부터 이러한 일들을 진행합니다. 왜? 간단합니다. 이미 정국이 기울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원소는 이미 조조를 압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기에 진행했습니다만, 하지만 그럼에도 급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완전히 판도가 굳어진 상태라고 보기엔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원소의 전풍, 저수 숙청 과정은 조조의 순욱, 공융, 최염 등에 대한 숙청 과정과 그다지 차이가 없습니다. 문제는 시기였죠.

 

조조의 숙청 또한 똑같았지만 조조 군은 딱히 큰 내분 없이 상당히 조용히 이뤄집니다. 다 숙청당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호족들은 조조에 대한 지지를 보냅니다. 왜일까요? 이미 판도가 조조에게로 넘어가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조가 하북을 모두 제패한 상태에서 조조를 거스른다는 것은 유비, 손권을 지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은 지역적인 거리 문제로,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야만 가능합니다. 또한 조조 자신이 협천자의 위치에 있었던 만큼, 조조에 대한 배신은 유가적 덕성에서 벗어나는 행위였습니다. 이미 유가를 자신들의 이념으로 받아들인 호족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이는 쉽게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오히려 조조 자체에 대한 지지까지도 등장하게 됩니다. 조조는 유가적 덕정을 거부하고 법가적인 맹정을 지향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는 호족 사대부들에게는 이념적 대립 구도였습니다만, 이 시기에는 판도가 희한하게 변합니다. 계속된 혼란의 지속은 유가인들 사이에서 법가적 방식의 차용을 검토하도록 만들었고, 특히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 집단 내부에서도 자신들이 그래야만 하는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시기 이후로 법조문들에 대한 유학자들의 주석이 유행하는 양상이 일어나는데, 이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소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일단 가장 간단한 대답은, 원소 자신의 문제입니다. 원소 자신이 이러한 체제 변환을 지나치게 빨리 진행하려 했던 것일 가능성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원소 자신의 판단 착오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관점을 살짝 바꿔보면 이미지 구축의 문제로도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어째 글이 점점 심리학 쪽으로 흘러가는 건 기분 탓입니다.

 

원소의 이미지를 우리는 우유부단 등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정작 당시 시대에서의 원소의 이미지는 청류파의 우두머리로서의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정말 그래서가 아니라 원소가 그 이전부터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만들어낸 이미지입니다. 이 이미지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 덕에 하북의 패자 위치까지 올라간 원소입니다. 그렇기에 원소는 협천자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유우를 황제로 세우는 안을 내세우고 동탁이 세운 황제인 헌제를 거부하는 등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이 청류적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그 이미지를 배반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전풍의 기습 공격안을 거부한 것은 정말 아들이 아파서일까요. 그 또한 그러한 이미지의 고수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유비가 백성들 끌고 다닌 거랑 맥락이 같습니다.

 

이 시기 호족들의 숙청 과정에서도 이 이미지가 어느 정도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호족 세력은 청류파 내의 존재들이니 당연히 아군으로 봐야 합니다만, 그 자신이 분열된 상태를 놔둘 수 없다는 부분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이 청류파의 우두머리고 그 리더십을 확실히 보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열 상태 자체가 문제고 그렇기에 그것을 청산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미지 형성에 해가 되고 나아가 그 문제는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 국가 전반에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풍, 저수를 지지하고 곽도, 봉기를 쳐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친위 세력을 쳐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권력 약화와 이어지기 때문이죠. 게다가 곽도, 봉기의 안 자체가 그렇게 나쁜 안도 아니었구요.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패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사실 전국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조조 군의 이들이 패할 것이 아니라 패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수준을 확신인 양 내세운 정도가 다였죠. 그렇기에 원소의 행동은 단순히 잘못된 것으로만 보기엔 어렵습니다.

 

 

오히려 더 문제는 후계자 문제인데요. 여기서 원소군의 더 큰 문제가 드러나게 되는데, 실질적인 친위 세력의 부재 상태입니다. 곽도, 봉기 등에 대해 위에서 친위 세력으로 이야기했습니다만, 실제로 이 속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들 또한 친위 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약간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풍, 저수 등 한복 휘하에 있던 기주 호족보담야 더 친위 세력에 가깝습니다만, 이들 또한 영천 지역의 호족 세력임에는 변함없었습니다. 사실 원소 군은 그 특성상 친위 세력이 형성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원소 자신이 설정한 이미지상이 청류파의 우두머리라는 것이었고, 그것은 호족 세력의 우두머리인 만큼 근본적인 부분에서 그의 세력은 모두 호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초기부터 원소를 지지했던 세력이라면 유훈, 장도, 순우경 등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들은 오히려 세력 구조상 원소의 휘하가 아니라 원소의 동맹군적 성향이 많았고, 결국 숙청의 대상이 됩니다. 봉기, 허유는 친위 세력으로 볼 수는 있지만 허유는 세력 구도에서 외면당했고, 봉기는 영천 파에 흡수되어버립니다. 결국 실질적인 친위 세력이 소멸, 또는 아예 없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이 부분이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원담과 원상 휘하의 장수들인데요. 만약 정말로 원소가 원상을 지지했었고 친위 세력들이 원소를 제대로 따랐다면, 곽도, 신평 등 영천 호족의 중심들이 원담의 휘하로 가는 기현상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원소가 원상을 지지하지 않았든가 영천 호족들이 원소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든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원상에 대한 지지는 일단 정사가 왜곡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습니다. 청주 자사의 건은 그럴 수도 있다지만 형의 후사로 장자를 보냈다는 것에서 원담에 대한 지지가 약했던 것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겠죠.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저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전체의 체제를 보자는 것이고 그 체제에 맞게 사람들이 행동했을 거라는 전제에서 나가는 글입니다. 원소에 대해 이러한 분석을 한 글은 아직 본 적이 없으니 이건 순전히 제 의견의 연속일 뿐입니다만, 적어도 그 기본 전제에서 전개되는 것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바에서의 최선을 다한다는 전제입니다. 원소가 그저 바보였고 우유부단했다, 이런 것은 그의 능력의 문제일 뿐이고 그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그저 쉽게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더 깊은 원소의 내면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답, 오캄의 면도날 이론처럼 명쾌하게 떨어지는 답 하나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내린 답을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모든 행위는 원소가 두 호족 세력을 모두 누르고 원소 자신을 중심으로 한 확고한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방식에서 나온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원소에게 있어 기주 호족 세력은 분명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었지만, 그렇다고 영천 세력 또한 자신에게 완전히 소속된 친위 세력은 아니었습니다. 원소는 청류파의 이미지 상에서 이 둘을 끌고 가야하는 것은 맞았지만, 동시에 이 둘을 누르고 자신의 권력 하에 두어야 한다는 이중적 난제를 지고 가야만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선 더 위협이 되는 기주 호족 세력을 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게다가 그에 반발한 기주 호족 세력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며 거의 숙청, 완전히 그 힘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영천 호족 세력이 오히려 그 결과 강해지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가 택한 답이 바로 원상에 대한 지지입니다. (이 부분은 이후 조조 정권에서 조식에 대한 지지와 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이는 이후 글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원상 개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원담과 원상이 갈라지자마자 영천 호족들이 원담 휘하에 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영천 호족들은 원담과 더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원소는 영천 호족들을 쳐야 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미 기주 호족 세력들은 약화된 만큼 내부 통솔이 가능했지만, 영천 호족들 또한 눌러야 하는 상황이라 정말 복잡복잡한 거죠. 그 과정에서 선택된 방식이 원상에 대한 지원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심배가 원상의 편을 든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배는 본래 출신은 기주 호족이었으나 영천 호족 세력과 긴밀한 연대를 맺고 있는 중립자적 입장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심배의 성격은 원소의 중립자적 위치와 함께 그나마 가장 친위 세력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양상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런 심배가 원상을 지지하는 것을 택했다는 것은 원소의 원상 지지 및 영천 세력에 대한 압박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영천 호족에 완전히 붙어버린 것 같았던 봉기가 원상 쪽에 붙은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친위 세력에 가까운 이들은 어쨌건 원상의 편에 붙습니다.

 

이러한 구조의 최대 난점은 원소의 사망 과정에서 확고히 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만, 적어도 그의 논리 자체에서의 허점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가장 복잡한 자군의 정치 파벌 문제의 해체 및 자신으로의 복귀를 꽤나 노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것이 역사가들 사이에서 폄하의 대상이 되었을지언정, 그 자신이 정말 그렇게 폄하가 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이 있네요. 하지만 어찌 됐건, 그 파벌들 간의 관계로 해석해나간다면 원소 측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글이 좀 많이 길어졌네요. 이후 부분은 글을 잘라 다음 글로 돌리겠습니다. 여전히 이쪽은 쓸게 많아요. ㅎㅎ;;

 

라시엘님의 삼국지설명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2. 유비가 삼고초려로 얻은 것은 제갈량이 아니었다

 

요새 기획 컨셉 같은 쪽을 공부하다 보니 충격적인 말부터 던지는 게 취미가 된 듯합니다. 대체 그럼 뭘 얻었다는 소리냐. 제갈량이 사실 제갈량이 아니라 제갈령이었냐. 뭐, 솔직히 말하면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제갈량이 삼고초려로 나온 건 맞죠. 그럼 저건 무슨 개소리냐. 간단하게 말하자면, 단순히 제갈량을 얻었기에 유비가 그렇게 강성해졌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제갈량을 얻은 이후 유비 세력이 대전환을 이룬 만큼, 제갈량은 대단한 전략가인 것이 분명하다. 뭐, 틀린 말이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제갈량 좋아하고 참 괴물 같은 인간이다 생각하니까요. 그리고 확실한 전략가, 기획가 한 명이 미치는 영향력 또한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제갈량 한 명이 과연 유비 세력을 통째로 바꿔놓았다는 게 가능한가의 문제이며 가능하다면 어째서 그것이 가능한가입니다.

 

약간 거슬러 올라가보죠. 왜 조조는 강할까요? 그냥 조조가 잘나서?

 

조조 또한 유비와 같은 시기가 있었고 그 세력은 갑작스러운 변혁기를 맞습니다. 이 또한 한 인물의 등장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는데요. 바로 순욱입니다. 삼국지연의 정도만 보셔도 알겠지만, 조조 군에 순욱이 들어온 이후 희한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순욱이 들어오고 얼마 안 있어 누굴 물어오고, 그 누구가 또 누굴 물어오고, 그 누구가 또 누굴  물어옵니다. 정욱, 곽가, 모개, 만총 등등 위나라의 기틀을 다진 인물들이 이 시기 조조군에 갑자기 막 유입되고 이름 있는 장수 수만 따져도 조조군이 두배에서 세배 이상 껑충 뛰어오릅니다. 삼국지 11에서 순욱이 안력을 가질 만한 부분이죠.

 

근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순욱의 능력이 출중해서? 뭐, 조조가 자신의 자방이라 표현할 정도니 출중한 건 사실이겠습니다만, 바로 이 현상이 유비가 제갈량을 얻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과 유사합니다. 손책 군도 마찬가지죠. 주유가 들어오고 장소와 장굉, 노숙, 제갈근 등등이 줄기차게 들어옵니다. 왜일까요? 바로 이것이 호족이란 체제의 특성이었습니다.

 

 

후한 말, 십상시를 대표격으로 하는 환관 세력의 대두는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예전 보정 체제에 대해서 글 쓴 걸 기억하실 텐데요. 보정은 분명 한시적인 제도이지만 그 세력이 강해지면서 이젠 오히려 황제의 권력과 쳠예한 대립각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특히 이것이 극에 달한 시기가 바로 후한 화제 시기입니다. 전대 황제였던 명제는 황제권의 강화를 실시하고 어느 정도의 평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만, 유언할 틈도 없이 사망하면서 제대로 된 보정을 두지 못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태후의 임조칭제가 실시되고, 보정의 필요에 따라 외척이었던 두헌을 보정으로 세우게 됩니다. 외척의 보정화 성향이 나타난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헌은 패부 경향이 강한 인물이었고, 보정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기에 이르죠. 그리고 화제는 결국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 친위 쿠데타를 성공, 두씨 일족을 제거하고 친정 체제를 확립합니다.

 

근데 이 시기 화제가 선택한 아군이 바로 환관이었습니다. 왜 하필 환관일까요? 모두들 환관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사실 황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환관은 가장 든든한 아군입니다. 신하들은 호족으로 지방에 기반을 둔, 아군이지만 동시에 불안 요소를 가진 적이기도 합니다. 외척은 지금 공격해야 할 대상이지요. 하지만 환관은 오직 황제에게만 귀속되어 있는 이들이며, 황제 없이는 어떤 힘도 가지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엄연히 황제의 수족이자 사노비입니다. 그렇기에 황제가 뭔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건 바로 환관이었습니다.

 

어쨌건 친위 쿠데타는 성공했고, 이때부터 환관과 외척 간의 대립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환관과 외척의 대립은 단순히 환관과 외척의 대립 이전에, 황제의 친위 세력과 호족 사대부들의 우두머리 세력 간의 대립이기도 합니다. 즉 황제와 호족의 대립의 표면적 상태가 바로 환관과 외척의 대립이죠. 그 중 누가 옳은 걸까요? 솔직히 말해서, 정당성은 황제 쪽에 있는 것이 맞습니다. 환관은 사실 욕먹을 짓한 게 아닙니다. 황제를 대신해서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호족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이건 자신들에 대한 공격이고, 따라서 욕합니다. 그렇다고 황제를 욕할 수는 없습니다. 역적으로 몰려도 할말 없죠, 그랬다간. 그럼 어떻게 할까요? 환관을 욕하는 거죠. 이것이 바로 청류와 탁류의 대립입니다.

 

보통 청류라 하면 고귀하고 정치 잘 했던 애들이고 탁류라 하면 썩은 애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거야말로 바로 "승자의 역사"의 표본입니다. 사실 이 싸움은 밥그릇 싸움입니다. 환관은 사대부들과 대립하기 위해 자신과 친분이 있고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세력들을 계속 끌어들입니다. 대항을 위한 자본 축적을 위한 착취도 지속되죠. 호족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하는 짓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죽어나는 건 백성들이죠. 이 과정에서 점차 농민들의 삶은 파탄 지경에 이르고, 결국 이것이 황건적의 난이라는 극단적 형태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황건의 난 이전에, 이 호족 세력 문제 때문에 다른 큰 문제가 벌어집니다. 바로 "당고"입니다. 탁류층 인사들이 청류측 인사들을 "파당"을 조성한다 하여 고발하고, 그래서 황제가 이들을 파직하거나 죽여 없애고 그들이 관직에 나올 기회를 박탈한 것이 바로 당고입니다. 창천항로를 보신 분이라면 당고를 모두 아실 겁니다. 장한의 사연은 참 애틋하죠. 하지만 정말 애틋할까요? 이건 사실 누가 잘하고 못했다가 아니라 이러한 밥그릇 싸움이 극단적으로 치달아서 한쪽이 한쪽을 친 사건에 불과합니다.

 

사실 파당이라는 것은 지금의 정당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법가 질서에서, 황제는 오직 유일한 존재이며 그 아래의 모두는 평등합니다. 그들이 하나의 단체를 만든다는 것은 황제에 대한 대항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은 역모에 해당하는 중범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호족 사회가 기본적으로 네트워크로 이뤄진 사회라는 겁니다. 한대의 정치 체제 자체가 향거리선제라는 추천제를 기반으로 서로가 밀어주고 끌어주는 인적 체제이며, 모두가 스승이니 제자니 하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거죠. 이것은 청류든 탁류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당고는 가장 상대를 치기 좋은 수단이면서 대신 자신들도 공격당할 수 있으니 위험 부담이 큰 양날의 칼이었습니다. 그러나 두무 보정 시기 청류파의 세력이 너무 강해지면서, 탁류가 선택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던 거죠.

 

어쨌든 이 사건을 기반으로 청류파는 상당 부분 와해되고 조정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온건파 청류들은 탁류와 어떻게든 공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상당수의 청류는 지방으로 낙향합니다. 그러나 어찌 됐건 이들은 호족이에요. 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고, 조정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그들이 끝장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지방을 근거로 하여 더욱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유력한 호족들은 서로 연결고리를 강하게 형성하게 되고, 각지에는 단단한 네트워크망으로 구성된 호족 파벌들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 호족 파벌 내에서 힘을 가르게 되는 것은 다른 호족들의 평가였습니다. 이것이 인물평이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어떻게든 유력자가 자신에 대해 비평한 인물평을 얻고 싶어했고, 기왕이면 더 좋은 평을 얻고 싶어합니다. 인물평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 호족 사회에 편입된다는 의미를 가지니까요. 조조가 왜 그렇게 허소를 쫓아다녀서 인물평을 얻고자 했을까요? 조조는 본래 탁류입니다. 환관의 양자의 아들이었으니 누가 봐도 탁류입니다. 그러나 그가 보았을 때, 단지 중앙을 장악하고 있던 탁류들의 힘만으로는 딱히 뭔가 해낼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동시에 명망이란 측면에서도 청류에 포함되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청류의 유력자 중 한명이었던 허소를 그토록 쫓아다녀서 "치세능신, 난세간웅"이란 평을 얻어야 했던 것입니다.

 

원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원소를 사세삼공 어쩌고 하면서 청류파의 수장격으로 보지만, 이것은 원소가 그토록 연출하고 싶었던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원씨는 청류긴 했지만 탁류에 우호적이었고 그에 붙어서 삼공이란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회색 세력이었고 상당히 많은 비난 속에 있던 세력이었습니다. 게다가 원소 자신은 서자이며 어머니는 노비였습니다. 비록 이 시기의 서자가 이후처럼 그렇게 천대받던 이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자에 비해 대접받았냐면 그것도 역시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원소는 소싯적부터 인맥과 경력 구축, 청렴한 이미지 구축 등 많은 부분을 신경썼고, 그 결과 그는 마치 청류파의 수장과 같은 이미지로 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결과로 원소는 관도대전 이전까지 하북 최강의 군웅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원소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제갈량의 결혼 또한 마찬가지 맥락입니다. 황씨의 미모는 차치하고, 황승언은 그 시기 형주 지역의 가장 유력한 명사 중 한명이었습니다. 반면 제갈씨는 본래 산동 지방 쪽에 소재를 두고 어쩌다 보니 밀려온 떨거지, 몰락 호족에 가까웠죠. 그의 결혼은 형주 호족들의 인적 네트워크로의 합류였으며, 그는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그 지역 호족 젊은 층의 수장격으로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서서나 제갈량의 친구로 등장하는 석광원, 최주평 등은 물론 마량, 마속, 장완 등등 수많은 이들이 제갈량과 인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었던 것은 바로 그의 결혼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어쨌건 네트워크가 구축되었고, 이제 중요한 것은 이 네트워크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제갈량 이야기를 하면서 잠깐 나왔는데요. 사실 네트워크란 것은 공평하게 모두가 연결된 시스템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이들은 노드로 한두개의 연결고리만 가지고 있으며, 중심이 되는 몇몇이 전체 네트워크를 지배하는 허브로 등장하게 됩니다. 인물평을 하기도 하고 인물평을 받기도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전체 네트워크를 지배하는 수준에 이릅니다. 제갈량과 순욱이 대표적이며 강동의 이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공융도 그런 인물 중 하나였죠. 이들이 바로 명사名士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그 인물이 아니라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전체 네트워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조와 순욱의 만남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순욱이 조조의 편에 섬으로써 연예주 지역 호족의 젊은 인사들 상당수가 그들의 편에 서게 됩니다. 또한 명사였던 순욱이 조조를 인정함으로써, 조조는 명실상부한 청류파의 일원이 되고 나아가 그 청류파를 이끌 인물로 부각된 것이죠. 원소와 저수의 만남,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 손책과 강동 이장의 만남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얻은 것은 단 한명의 뛰어난 장수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의 흡수였으며, 네트워크의 흡수는 그 호족 세력들 내부의 인재들과 함께 그들의 사병을 기반으로 하는 힘까지의 흡수라 봐야 할 것입니다.

 

 

왜 그토록 유비는 제갈량에 목매달아야 했을까요. 유비는 비록 서주에서 한번 그럴 기회가 있었지만, 청서 지방 최고의 호족이었던 공융은 하나의 군웅으로서 할거하고 있었고 서주의 인적 네트워크는 생각 외로 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걸 흡수할 만한 시간도 상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형주에서 그는 제갈량을 등용함으로써 전체 네트워크를 흡수하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얻은 것은 단 하나의 인재가 아니라 형주 지방에서의 수많은 인재로 통하는 길이었으며, 형주 지방의 호족 네트워크와 자신이 결부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전까지 한의 재흥이라는 기치와 명분만이 존재했던 유랑군 유비 세력이, 하나의 굳건한 세력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호족은 국가 세력에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호족이 양날의 칼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호족과 군주와의 대립 과정에서 나타난 많은 사건들을 한번 다뤄보도록 하죠.

 

한동안 게임 공략에 사고가생겨.(그놈의 쿠노이치 난이도... 아 시노비부터 찍어야 하는데 게임이 없어요 그 이유 진짜 지금 생각해도 빡도네. 내가 꼬불쳐 둔 돈으로 사는게 죄인가? 내가 사달라고 했어?)

 

쿠노이치를 깨든지 아님 딴 게임을 하든지.... 그냥 돌파라도 해야겠지요.

 

본 호족 시리즈는 삼국지 관련으로 관련 지식 사이트에서 가져온것입니다.

문제시에는 제가 스스로 적정한 처리를 하겠습니다.

 

 

라시엘이라는 분의 작품으로 현재 그분은 이글루 활동 중입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 보정 글을 올렸던 라시엘입니다.

 

일전 글을 올릴 때 호족 관련 글을 한번 올린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혹시나 기억하실까 모르겠네요. 사실 호족이란 개념은 한국사 공부할 때 자주 보셨던 개념이라 중국과, 특히 삼국지와 무슨 상관이냐 하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삼국시대를 읽는 가장 중요한 틀 중 하나가 호족이 아닐까 합니다. 호족 체제가 바로 그 시대의 가장 중심이 되는 구조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설로서의 삼국지연의에서 인물 중심의 논의도 중요하며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적 구조를 안다면, 그 이해에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네요. 왜 그 인물들이 그렇게 행동하였는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구조, 시대적 패러다임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사례 중심의 서술이 많습니다. 또한 1차 사료보다는 2차 사료인 논문 등의 자료를 참조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아두시면 좋습니다. 주로 참조한 책은 홍승현 선생님의 "사대부와 중국 고대 사회"입니다.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아요.

 

가는 길이 좀 많이 길 것 같습니다. 몇편의 시리즈로 나눠서 올리도록 하죠.

 

 

1. 호족의 사상적 기반 : 유가

 

중국 역사는 수많은 사상들의 혼재 속에서 진행됩니다. 춘추전국시대 때 형성되었던 법가, 유가, 도가, 병가, 종횡가, 묵가 등의 사상은 그 시대 뿐 아니라 이후 시대까지 관통하는 중요한 사상들입니다. 또한 인도에서 전파되었던 불교의 사상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배층 구조라는 측면에서 볼 때, 중국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심 되는 사상은 역시 법가와 유가였습니다. 도가와 불가는 아무래도 종교적 성향이 강하여 민중 중심의 영향력을 주로 행사했고, 병가나 종횡가는 해결 중심적 요소 성향 때문에 특정 분야에 특화되는 경향이 있었지요. 그러나 법가와 유가는 지배층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 역사, 특히 위진남북조의 역사는 이 법가와 유가 간의 대립 구도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법가와 유가일까. 이는 중국 지배층을 구성하는 두 요소에서 비롯됩니다. 바로 황제와 신하입니다. ...엄청 뻔해 보이는 지배층 구조인가요. 왕 있고 신하 있고 당연한 소리니까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배층 역사에서 황제와 신하는 동상이몽 상태에 있었고 대립 구도로 점철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황제는 법가를 통한 강력한 일원적 지배 체제를 추구했고, 신하는 유가를 통한 중간자적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간단하게 법가와 유가의 지배 체제를 설명드리겠습니다.

 

흔히들 법가는 법을 중시한다, 현대적 체제와 비슷하다 하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법가에서의 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아직 성문법적 체제가 자리잡기 이전, 중국에서의 법은 곧 황제의 결정이었습니다. 황제가 결정하면 그것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따라야 한다는 것이 바로 법가의 사상의 요체이자 실상입니다. 물론 법가의 시작을 알렸던 상앙, 한비 등이 법제를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황제의 뜻에 따른 법제였습니다. 이사의 대에 그러한 체제가 완비되었고, 첫 황제 체제였던 진대의 법가는 오직 황제만이 법을 결정하는 절대적 존재로 부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상태에서 신하들의 입장입니다. 법가 지배 체제에서 황제는 절대적 존재인 만큼, 신하는 그 존재 가치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보통 봉건적 지배 구조에서 왕과 민 사이에는 신하, 제후들이 위치하죠. 그러나 법가는 이러한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고자 합니다. 신하들은 오직 황제가 명령한 것을 따라서 행동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비웃는 게 아니라 그것이 원칙입니다. 이 시기의 관리들에 대해 도필리라고, 조각칼 들고 죽간에 새기는 것밖에 모른다고 비웃었던 것은 사실 그래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결정 권한은 오직 군주, 황제에게만 있으며, 관리는 자의적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체제 아니냐 하지만 신하들은 죽을 맛이죠. 또한 이러한 체제는 엄청난 행정적 비용을 감수해야 합니다.

 

왜냐고요?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죠.

 

황제의 법령에는 상대에게 5cm의 상처를 냈을 시 벌금을 10냥을 내라고 적혀 있다고 합시다. 근데 회계에서, 어떤 노인이 나뭇가지로 상대를 때려 7cm의 상처를 냈습니다.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산해서 14냥을 내라고 해야 할까요?

 

예. 그렇게 판단한 관리는 역모 죄로 사형을 당해야 합니다.

 

읭? 무슨 소리냐고요? 저건 관리가 자의적으로 판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법령에 적혀있지도 않은데 개인적인 판단으로 합니까. 그건 황제의 고유 권한이고 지금 관리는 황제의 권한을 침범한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죠? 간단합니다. 황제한테 물어봐야죠. 그래서 회계에 있는 관리는 장안(함양)에 있는 황제에게 죽간을 보냅니다. 이러이러한 사안이 있는데 어떻게 처리할깝쇼. 말을 열심히 달려 장안까지...... 허허; 어찌 됐건 도착했는데 이미 그런 죽간은 수천개가 쌓여있습니다. 전국을 다 그렇게 통치하니 별 수 있나요. 몇달을 기다려 황제의 결정이 내려지고, 또 말을 열심히 달려 회계로 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판결을 내리려 하는데......

 

어? 그 사이 노인이 늙어 죽었네요.

 

이게 법가의 실상이었습니다. 예전 수업 들을 때 기억으로는, 사료에 진짜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고 기억합니다.

 

 

이 시기의 법률은 성문법의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판례법입니다. 황제가 판단한 예시들을 근거로 그것에 따라 집행하는 판례법이 법가적 법술 정치입니다. 판례법은 미국 예시만 봐도 아시겠지만 꽤나 복잡합니다. 예시를 일일이 뒤져야 하니까요. 그래서 진대의 법률이 복잡했던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이 과정에서 융통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판례는 계속 추가되지만 오직 황제의 권한이며, 관리는 결정할 수 없습니다. 법률은 점점 복잡해지지만 관리는 오직 예시만 한참 뒤지다가 황제한테 또 물어봐야 합니다. 점점 더 복잡함은 심해집니다.

 

게다가 관리는 자기 판단조차 할 수 없으니 이 체제가 맘에 들 리가 없습니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자신의 결정권을 늘리길 원합니다. 오직 하나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은 엄청난 스트레스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황제 이하 제민평등이라지만, 그걸 아무리 추구해도 이 시대의 정치 권력엔 한계가 있으며 민들 간에는 차이, 특히 경제능력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현대 공산주의 사회도 못 이룬 걸 기원전에 하려고 했으니 될 턱이 있나요. 하지만 경제능력 차이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권력을 쥐고 싶죠. 하지만 그건 황제만의 권한이니 그것이 틀렸다고 할 만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가입니다.

 

 

법가 질서가 뭔지 딱 보이시나요? 유가의 질서는 법가 질서보다 복잡해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더 간단합니다. 유가의 질서는 간단히 말하면 가족 질서를 국가 질서로 확대한 것입니다. 군주는 곧 아버지고 신하는 곧 어머니나 큰형, 큰누나입니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은 유가 질서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말입니다. 하지만 가족 사회는 아버지가 결정하고 다 땡인가요? 아닙니다. 아버지는 권위가 있는 존재지만 최종 결정권을 지니고 있을 분이고, 많은 부분에서 구성원들은 자의적 판단이 가능합니다. 군사부일체지만 동시에 부창부수입니다. 여기서의 관리는 그저 민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신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되며, 황제의 조력자로 활동하는 근거로 작용합니다.

 

진대의 법률이 복잡해서 유방이 약법삼장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이건 참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단순히 법을 정비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판례법을 세 줄로 적힌 성문법으로 바꾼 겁니다. 법률 쪽 공부하시는 분들은 순간 유방이 미쳤구나 싶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변형은 곧 법가적 질서가 유가적 질서로 넘어가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으론 유방이 그저 멍청해서 법이 복잡하니 이해 못 하겠으니까 그런 걸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을 그토록 많은 사서들이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그것의 상징성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어쨌든 유가의 사상은 황제 입장에서야 못마땅하겠습니다만, 신하들 입장에선 꽤나 구미에 맞는 부분입니다.

 

 

근데 그럼 신하는 어떻게 구성될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호족입니다.

 

호족이란 간단히 말하면 지방 유지입니다. 이 시기 지방에서 힘 좀 쓴다 하는 조폭들이 곧 호족입니다. 돈도 좀 있겠고 토지도 좀 있겠고 그래서 지방에 대한 영향력도 그럭저럭 있습니다. 게다가 진말한초의 혼란기를 틈타 사병도 길러서 힘도 그럭저럭 있습니다. 진대에는 워낙 강압적으로 누르니 깨갱 하고 있었습니다만, 한 고조 유방의 최초 군국제 체제를 틈타 이들은 각지에 봉해진 제후들 휘하에 들어가며 공신력도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초기 소하, 조참 등 도필리 출신의 법술가들이 지배할 때는 그나마 좀 눌려 있었습니다만, 어차피 그들이 본격적인 법가 체제를 추구하지도 않았고 초기 전한의 황제가 그럴 만한 힘도 없었기 때문에, 호족의 득세는 점차 커져갑니다.

 

하지만 한무제 시기 호족들은 진시황 때와 마찬가지로 한바탕 꽉 밟혀봅니다. 자신들의 권력 기반이었던 토지는 몽땅 쪼개지고, 한무제의 정책 영향으로 공신력을 주던 제후들이 개박살납니다. 다시금 진시황 때와 같은 법가 정치로 넘어가려는 것이었죠. 다행히 한무제가 죽으면서 보정 체제로 전환되었고, 그를 틈타 호족들은 다시 회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호족들은 자기 반성을 시작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황제 한명 또 강한 놈 나오면 다 밟혀죽는다"

 

그리고 그들은 본격적으로 황제 체제 자체를 뒤엎어가기 시작합니다. 즉 이론적인 측면에서 중무장해서, 황제가 다시금 법가적 정치를 펼치고자 할 때 그것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뒤져보니 유가 사상만큼 그 구미에 딱딱 맞는 게 없는 겁니다. 묵가를 골랐다간 이거 민중이 다 올라서게 생겼고, 도가는 뭐 하라는 건지 알아듣지도 못하겠고요. 병가, 종횡가는 난세에야 효과가 있지만 치세의 지금 이 상황에 전혀 적합성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음양가 같은 쪽은 뭐 신경쓸 여지도 없고요. 그래서 그들은 유가의 지식을 습득하며 황제에 대항할 힘을 축적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호족 사대부의 탄생입니다.

 

지난번 제 보정에 관련된 글에 대략적인 내용이 나오긴 했는데요. 이러한 그들의 체제 강화에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보정입니다. 유가적 입신양명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황제 중심의 체제를 붕괴시키고, 호족들에게 공신력을 부여하면서 황제 권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힘을 기를 여지를 준 것이 바로 보정 체제입니다. 결국 이들의 힘은 점점 커져갔고, 이러한 호족 세력의 대표격이었던 인물 한 명이 호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국가를 전복시키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왕망의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위기가 다시 한번 닥치니, 그것이 바로 왕망의 신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사실 왕망의 왕전제 체제는 호족들 보고 죽으라는 겁니다. 토지 전체를 국유화하겠다 어떻다. 진황과 한무의 시대로 돌아가라는 소리니까요. 이는 왕망이 이상주의였기도 하지만, 동시에 왕망 자신이 호족이었던 만큼 호족을 누를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준비에 태만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어쨌든 이러한 왕망의 태도는 호족들에게 거의 배신감과 같은 충격이었고, 결국 호족 중 한명이었던 광무제를 중심으로 뒤집어 엎기에 이릅니다.

 

 

광무제는 호족들의 지지로 되었고 호족들 없이 뭘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만큼, 전한 시기 유가가 지배 이념으로 확립되지는 않고 암묵적으로만 신봉되던 것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보정 체제와 결부되면서 유가는 점점 공고해졌고, 호족 사대부 세력도 점점 공고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 상태에서, 삼국 시대가 개막합니다.

 

 

어쩌다 보니 글이 길어져서 삼국 시대 이야기는 들어가지도 못했네요.

다음 글에선 삼국 시대의 호족과 사건들에 대해서 다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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